몸은 개인의 것이지만, 병은 사회에서 자란다

가난, 비만, 그리고 위고비 이후에도 남는 질문들

by 문어

살찐 사람을 보고 우리는 거의 반사적으로 ‘그 사람이 게으를 것이다’, ‘참을성이 없을 것이다’, ‘자기 관리에 실패했다’라는 추정 또는 판단을 하곤 한다. 게다가 그 판단은 우습게도 빠르고 거친 주제에, 확신에 차 있다. 그런데 한 가지 물어보자. 그 판단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 사람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누군가가 더 쉽게 살이 찌는 것을 따라가다 보면, 사실 그가 가진 의지 이전에 언제나 삶의 조건이 먼저 놓여 있다. 우리는 몸을 단순히 개인의 성적표로 바라봐선 안된다. 그것은 사회가 자원, 시간, 회복의 기회를 어떻게 배분했는지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몸은 혼자 아프지 못한다

우리는 건강을 너무 쉽게 개인의 책임으로 돌리곤 한다. 그가 무엇을 먹었는지, 얼마나 움직였는지, 의지가 강했는지 등을 묻는다. 살이 찌면 게을렀다고 말하고, 병이 생기면 자기 관리를 못 했다고 단정한다. 몸에서 일어난 일을 곧장 그가 가진 습관과 태도의 문제로 환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몸은 진공 속에 존재하고 있지 않다. 식탁 위에 놓이는 음식의 가격, 집 근처에 걸을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지, 아플 때 바로 병원에 갈 수 있는 시간과 돈은 충분한지 혹은 쉬고 회복할 수 있는 권리가 확보되어 있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즉 몸은 개인의 것이지만, 그 몸이 놓인 조건은 사회의 것에 가깝다.

이 점을 가장 주목하여 설명한 것 중 하나가 조 펠란, 브루스 링크, 파리사 테라니파(Jo C. Phelan, Bruce G. Link, Parisa Tehranifar)의 건강 불평등(Health Inequality) 이론이다. 이 세 사람은 2010년에 발표한 논문에서 사회경제적 지위, 즉 SES(Socioeconomic Status)가 건강 격차의 근본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그것의 원인은 단순하다. 돈, 지식, 위신, 권력, 사회적 연결망 같은 자원을 더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병을 피할 수 있고, 또 빠르게 치료 기회를 잡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병의 종류가 바뀌고 치료 기술이 발전해도 이 격차는 사라지지 않는다. 새로운 의학 지식이 생기면 그 혜택은 대개 자원이 많은 사람에게 먼저 닿는다. 그래서 사회는 발전하는데 건강 격차는 그대로 남거나 오히려 더 벌어지기도 한다.

이 이론이 중요한 이유는 우리가 건강 문제를 바라보는 질문 자체를 바꾸어 버리기 때문이다. 즉, ‘왜 저 사람은 운동을 안 했을까’라고 묻는 것 대신 ‘왜 어떤 사람은 운동할 시간을 확보하기, 공간에 접근하기 어려운가’를 묻게 만든다. 또 ‘왜 병원에 늦게 갔을까’ 대신 ‘왜 어떤 사람은 아파도 병원에 가기 힘든 삶을 사는가’라고 묻게 한다. 이렇게 질문이 바뀌었으니 책임의 방향도 바뀌어야 한다. 개인의 부족함을 책망하던 것에서 개인이 처한 삶의 조건을 살피는 시선이 되는 것이다. 결국 건강은 병원 안에서만 만들어지지 않는다. 임금, 교육, 주거, 노동시간, 돌봄의 부담, 지역 환경이 모두 아우러져 구성원들의 건강을 함께 만든다.


비만은 칼로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비만은 이 문제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비만만큼 빨리 타인을 부정적으로 비추는 주제도 드물다. 앞서 말했듯, 사람들은 누군가의 뚱뚱한 몸집을 보면 그 사람이 부정적 습관을 가졌으리라 유추한다. 나아가 성실하지 못할 것이라고까지 추측한다. 하지만 제프리 소벌과 앨버트 J. 스텅커드(Jeffery Sobal, Albert J. Stunkard)가 1989년에 발표한 논문(Socioeconomic status and obesity: a review of the literature, 사회경제적 지위와 비만: 문헌 고찰)은 그렇게 단순한 판단에 제동을 건다. 이들은 사회경제적 지위와 비만의 관계를 다룬 과거 연구들을 검토했고, 그 결과 선진국 여성 집단에서 SES가 낮을수록 비만율이 높다는, 강한 연관관계가 있음을 확인했다. 이 결과가 선진국 남성과 아동에서는 일관되지 않았는데, 한편 개발도상국에서는 오히려 SES가 높을수록 비만이 많은 반대 양상이 뚜렷하게 나타났다. 즉, "가난하면 반드시 비만하다”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다만 분명한 것은 적어도 많은 선진 사회에서 비만이 풍요의 상징이 아니라 불평등의 흔적으로 읽히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 연구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비만을 단지 식욕이나 칼로리의 문제로 다루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몸무게는 그 사람의 의지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어떤 음식을 얼마에 살 수 있는지, 하루를 어떤 노동으로 보내는지, 퇴근 뒤 남는 체력과 시간이 있는지, 몸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누구에게 더 가혹한지 등 모든 것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안타깝게도 값싸고 오래 보관되며 빨리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대개 당과 지방, 염분이 높다. 반면 신선한 재료, 충분한 휴식, 규칙적인 생활, 운동할 시간과 공간은 누구에게나 같은 값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어떤 사람에게는 건강한 식단이 습관의 문제일 수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비용 때문에 애초에 선택지에 올리지 못하는 조건의 문제일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회의 잔인한 모순과 마주한다. 사회는 사람을 살찌기 쉬운 환경 속에 밀어 넣고, 살찐 몸을 부정적이게 바라본다. 긴 노동시간, 불안정한 소득, 스트레스, 수면 부족, 낮은 접근성의 의료 환경은 그대로 두면서, 그 결과로 나타난 몸에게 ‘왜 자기 관리를 하지 않았느냐’라고 묻고 있는 것이다. 구조가 만든 결과를 개인의 부족함이란 문제로 바꾸는 순간, 사회는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결과적으로 그가 가진 몸의 형태를 곧장 인간의 성실성으로 보는 습관은 무지할 뿐만 아니라 비겁한 것이다.


비만한 몸은 왜 두 번 아픈가

비만한 몸은 단지 의학적 문제의 대상이 아니다. 종종 낙인의 대상이기도 하다. 병원에서, 학교에서, 온라인에서, 사람들은 체형을 두고 쉽게 농담하고 쉽게 평가한다. 그리고 이때 비만은 몸의 부담과 시선의 부담으로 인해 사람을 두 번 아프게 만든다. 더 잔인한 것은 이 시선에 언제나 언제나 사회적 원인은 소거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가 왜 그런 몸이 되었는가를 묻기보다, 어떤 사람이기에 그런 몸을 갖게 되었는가를, 심지어 묻지도 않고 추측한다. 틀렸다. 우리가 해야 할 정교한 질문은 이것이어야 한다.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스스로의 몸을 돌볼 조건이 더 부족한가. 왜 어떤 사람들에게는 건강하고자 할 때 필요한 선택들이 더 비싸고 더 접근하기 어려운가.

거듭 언급하지만, 몸은 성적표가 아니다. 몸은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 노출된 환경의 양호한 정도, 자신을 돌볼 수 있는 여유, 노동의 강도, 불안함 등을 포함한 총체이다. 어떤 몸도 혼자 만들어지지도, 만들어질 수도 없다. 또 어떤 병도 홀로 자라지 않는다. 그래서 몸은 생물학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문장이다.


위고비의 시대, 그래도 남는 질문

이런 상황에서 위고비(세마글루타이드)와 마운자로(티르제파타이드)와 같은 약물의 등장은, 비만을 바라보는 인식을 빠르게 바꾸고 있다. 적어도 이제 비만을 단순히 나태함의 상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치료가 필요한 질환으로 보는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가 가진 몸을 향해, 조롱을 하기보다는 치료와 지원의 언어가 많아지는 것은 분명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여기서 다시 건강 불평등 이론의 질문이 머리를 든다. 새로운 치료가 등장했을 때, 그 혜택을 가장 먼저 누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약값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 꾸준히 진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 부작용을 관리할 시간과 정보를 가진 사람, 제도의 문턱을 넘을 수 있는 즉, 자원을 가진 사람이 우선적으로 그 문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처럼 의학의 발전은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이 되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는 희망으로 남게 된다.

바로 여기에 건강 불평등의 가장 냉혹함이 숨어 있다. 좋은 기술이 나왔다고 해서 그 혜택이 저절로 공평하게 분배되지는 않는다. 치료제가 생겨도 사회의 바닥이 고르지 않으면, 그 치료는 기존의 격차를 줄이지 못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다시 드러나게 된다. 그래서 위고비 이후의 시대에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단순히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는가’가 아닌, ‘누가 이 치료를 실제로 이용할 수 있는가’이다. 좋은 약이 얼마나 많은가 보다 그 약의 혜택이 얼마나 공정하게 닿는가, 에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더 나은 몸을 원한다면, 더 나은 사회여야 한다

비만 문제를 두고 ‘덜 먹고 더 움직여라’라는 말만 반복하는 사회는 사실 매우 게으른 곳이다. 그 말은 쉽고 빠르고, 무엇보다 말하는 사람 자신을 편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그런 문장은 아무것도 고치지 못한다. 진지한 사회라면 더 불편한 질문을 견뎌야 한다. 왜 건강한 음식은 더 비싼가, 왜 가난한 지역일수록 의료와 운동 환경이 더 취약한가, 왜 장시간 노동은 너무 쉽게 당연시되는데 그 결과로 생기는 건강 악화는 개인 책임으로 돌아가는가, 왜 몸집에 대한 조롱은 농담으로 소비되지만 그 몸이 놓인 조건에 대한 비판은 불편한 말로 밀려나는가 등과 같은 것들 말이다.

결국 건강한 사회란 단지 날씬하고 관리된 사람이 많은 사회가 아니다. 아픈 사람을 조롱하지 않는 사회, 병을 개인의 자기 관리 부족으로만 해석하지 않는 사회, 건강을 지킬 자원을 조금이라도 더 공정하게 나누려 애쓰는 사회가 보다 건강한 것이라 생각한다. 펠란과 링크, 테라니파가 보여 준 것은 건강의 계단 아래 놓인 자원의 분배였고, 소벌과 스텅커드가 보여 준 것은 비만의 그림자 뒤에 드리운 불평등의 구조였다. 그리고 오늘의 비만 치료제 열풍은 우리에게 다시 묻는다. 새로운 약이 나왔지만 왜 여전히 어떤 이들은 더 오래 아프고, 또 어떤 이들은 더 쉽게 비난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워지지 못하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한 답이 ‘그 사람이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이라면,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그 몸을 가진 개인이 아닌, 그 몸들이 그렇게 되기까지 방치해 온 사회 전체에 있다.

그래서 우리의 시선과 말은 달라져야 한다. 즉, 개인의 몸과 건강을 성적관리 측면으로 보지 않고, 체형을 성실성의 방증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건강을 권할 권리는 있을 수 있으나, 몸을 모욕의 대상으로 삼을 권리는 없다. 치료에 대해 말할 수는 있어도 그것을 만든 구조를 지워서는 안 된다. 누차 말하듯, 어떤 사람의 몸도 스스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또 어떤 병도 홀로 자라지 않는다. 우리의 몸은 우리가 사는 사회의 문장을 닮는다. 더 나은 몸을 갖길 원한다면, 우리는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