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이었다. 세바시에서 <별 볼 일없는 내 이야기를 135만 명이 읽은 이유>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한 게. 그때 나는 책이 나오기 직전이었고 주민센터에서 글쓰기 선생님을 한지 몇 개월 되지 않았을 때였다.
무대에 서기 전 긴장한 채로 무대를 바라보았다. 앞쪽에는 줌 화면의 사람들이 띄워져 있었지만
나는 눈이 나빠 그들이 흐릿하게 보였다. 올라가기 전 직감했다.
‘아마 올라가도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거야.’
그런데 무대에 서서 '안녕하세요.'를 하고 나니 글쓰기 첫 수업 때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
보이지 않던 사람들을 나는 그릴 수 있었다. 사람들이 사람을 환영할 때 짓는 표정, 제스처 그 모든 것들을 종류별로 척척 그릴 수 있었다. 가만히 쳐다보며 눈으로 웃는 사람, 손으로 박수를 쳐주는 사람, 그냥 끄덕끄덕하는 사람, 눈을 약간 크게 뜨며 웃어주는 사람. 웃지는 않아도 진솔한 눈 맞춤을 해주는 사람, 경직되어있는 눈과 입 사이로 묘하게 상대를 배려해주는 느낌을 풍기는 사람 등..
덕분에 눈을 보고 말하듯이 강연을 마칠 수 있었다.
이 날이후로 모든 일들은 이어진다고 믿게 되었다. 한 번도 사람들 앞에서 강연이라는 걸 해본 적 없었지만 내가 그동안 실패했던 직업들은 내게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때 내 강연 주제는 135만 명이 내 글을 읽은 이유였는데 다 브런치 덕분이었다. (그리고 읽어준 여러분들 덕분이었습니다.)
아이가 커감에 따라 밑으로 달랑거리는 다리의 길이가 점점 길어지는 느낌, 혹은 할머니가 키우는 애는 딱 티가 난대, 저 집은 애들 옷 전부 얻어 입힌대요. 혹은 첫 알바의 실수담이었던 어떤 여자 관람하시겠습니까. 이런 글을 브런치에서 많은 분들이 읽어주었다.
이런 것밖에 쓸 수없어하며 써 내려간 글이었지만 쓰다가 보니 사소하고 소소한 것의 힘을 나는 믿게 되었다. 그러니까, 지금은 그것만의 힘이 있다고 믿는다. 글을 쓰며 나는 내가 특별하진 않아도 고유한 존재라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리고 내가 사실이라고 믿었던 과거들이 느낌으로 그 상황을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때로는 그런 기억만 모으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얼마 전 팟캐스트 녹화를 하는데 MC가 내게 물었다.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 엄마들이 많이 있는데요. 그리고 경력단절로 육아만 몇 년씩 하다가 다시 사회로 나가기에 주춤하는 분들이 많으세요. 그분들에게 힘이 되는 말씀 하나만 부탁드립니다."
나는 대답했다.
"일단, 양말을 신으세요."
나는 모든 상황에서 양말을 신었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대부분의 일은 실패했고 지금 글을 쓰는 일만 성공했다. (물론 이 성공의 기준은 주관적이다. 글쓰기를 가장 오래, 꾸준히, 그리고 나답게 하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아침이 되면 일단 늦더라도 양말을 신는다. 그리고 내가 할 일을 하러 간다. 그러면 실패할 수도, 성공할 수도 있지만 일단 방법은 그거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시도하지 않으면 성공은 둘째치고 실패도 하지 못한다. 한 달 전에는 세바시에서 글쓰기 수업 영상을 찍고 왔다. 거기서도 나만의 이야기를 한다. 나라서 할 수 있는 수업, 나라서 겪은 에피소드들. 점점 나다운 결정들이, 행동들이 늘어가고 있다.
"여러분들이 열심히 노력하면 다 잘할 수 있어요!"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다면 거짓말이다. 여러분들은 어제 한 일을 오늘 좀 더 잘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어떤 상황인지 나만 안다. 내 삶을 재정리하는 것은 내 몫이다. 일단 나에 대한 평가부터 스스로 잘못 내린다면 아마 모든 일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할 것이다.
평범한 내 이야기를 135만 명이 읽어준 이유는 간단하다. 내가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사람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 이야기를 양말을 신고 커피숍으로 가서 글로 옮겼기 때문이다.
카키색 파카를 입고 그해 내내 밤 열 시가 되어야 도서관에서 나와서 집으로 향했던 내 모습과 휴대폰을 팔 때 밤마다 술을 마시던 모습, 그리고 아파트 분양사무실에서 물티슈가 가득한 캐리어를 끌고 다니며 낯선 곳의 사람들에게 말을 걸던 내 모습.
그 모든 것들은 한 개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단편 여러 개가 아니라 기 승 전 결로 이어지는 하나의 이야기.
우리는 평범한 사람인 동시에 각자의 이야기가 있다. 모두, 고유한 존재이다.
check list
어제와 오늘은 이어지고 오늘과 내일은 이어진다. 그것을 믿고 오늘 하루를 잘 채우자. 접한 것은 접하지 못한 것들을 항상 이긴다. 내가 5년 후, 10년 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미리 접하자. 글쓰기를 잘하고 싶다면 오늘 글쓰기를 접하고 좋은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오늘 그림을 접하고 사랑하는 사람과 잘 살고 싶다면 오늘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접하자. 일단 양말을 신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