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kjo Dec 08. 2023

가장의 여정

나를 채우는 과정

잠시 귀를 기울여 노트에 다가가면 어느새 눈 밟는 소리가 들린다. 뽀드득 뽀드득 손끝으로 눌려진 만년필은 하얀 여백에 발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끝없이 펼쳐진 설원에 발목까지 차오르는 눈밭을 낑낑거리며 길을 만들고 있다. 힘겹게 지나간 자리에는 수없는 끄적거림이 넘실거린다.


마흔을 넘자 달려온 세월만큼이나 지쳐 기침이 가시지 않았다. 가슴속 깊은 곳까지 통증이 올라오던지 결국 폐렴으로 병상에 누웠다. 불쑥 들어오는 바늘침은 더더욱 두려움이었다. 못내 병들어 누워있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방울방울 떨어지는 항생제를 보며 재차 시간이 빨리 가기만을 바랐다. 사실 낯선 곳에 대한 불편함은 언제나 현실이었다. 생각해 보면 여전히 삶은 불편함이었다. 삶의 관계에서 오는 서로의 공방을 애써 외면하며 살다 보니, 마음의 화는 잠깐의 터치로도 터질 수 있는 화약고가 되었다.


어디까지 올라왔을까.



놓여 있는 여백엔 어느새 산이 그려져 있었다. 하나 둘 끄적이는 가운데 정상을 오루지 못해 이리저리 끼적이는 모습이 현재의 나를 보여주고 있었다. 참으로 그렇다. 지쳐버린 것이다. 지쳐버린 몸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결국 마음의 화가 독꽃을 피웠다. 뿜어져 나오는 기침은 예사소리가 아니었다. 차마 상대에게 뿜을 수 없는 화가 내게 뿌려져 버린 것이다. 결국 걷다가 지쳐 누워버린 눈밭은 무한한 두려움이었다. 식솔을 이끄는 가장이 멈추어 있다는 것은 다 벗겨져 설원에 내던져지는 것이다.  정상을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지만 어떻게든 정상에 가야 하는 의지는 분명했다. 적어도 나는 삶을 정의할 수 있었다.


밤새 뒤척이며 맞혀놓은 알람이 울리기 전 가까스로 눈을 떴다. 정확히 시간을 재단하지 않으면 출근시간을 맞출 수가 없었다. 아내는 분주하게 출근준비를 도왔다. 커피머신이 요란하게 커피를 내리면 내심 새벽에 다른 공간에 해를 주지 않을까 하며 마음을 살짝 졸인다. 코 끝에 와닿는 에스프레소 향기가 이젠 출근길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겨울의 새벽은 잠들기 전 밤과 다르지 않았다. 몸이 으스스하며 주변을 보니 남평 오거리에 다다랐다. 길 가 한 모퉁이엔 야광띠를 두른 장정들이 삼삼오오 모여있었다. 인력대기소 주변에 갈팡 질팡하면서 뿜어져 나오는 한숨과 담배연기가 눈에  밟힌다. 분명 새벽 6시 15분, 일거리가 잡혔다면 진작에 투입되었야 하는 시간인데 하루를 날려버리는 아슬한 시간이 가고 있다. 오거리 신호 대기 중 바뀐 녹색등은 이내 갈 길을 열어줬다.


이제 적응할 만도 하는데 새벽부터 시작된 항생제 치료는 또 다른 출근길이었다. 마냥 누워 있으면 편하고 좋을 것 같지만, 예상하지 못한 자리가 얼마나 좋겠는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쳐오고 나이가 들어감에 약해지는 육체는 누구나 그러하듯이 보통사람이라면 자연스럽다. 저마다 정상을 위해 열심히 오르고 있다는 것이다. 정상은 보이지 않지만 나는 살포시 쉼표를 찍는다. 폐렴으로 마음과 몸이 많이 약해졌지만 잠깐의 숨을 들이마시고 여정을 준비하려고 한다.


창밖 너머 한바탕 쏟아진 눈에 뒤덮인 만연산은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 어느새 마음을 단단히 붙잡고 꽉 진 만년필로 다시금 나를 세워 일으켰다. 몇 번 휘갈겨 만들어진 날개는 식솔을 태우고 단박에 정상으로 날아올랐다. 현실에서는 절대 이룰 수 없겠지만, 어찌 나만의 공간에서 무엇을 하지 못하겠는가.


나의 여정은 이제 시작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