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전쟁
<리비우스 로마사>는 로마 제정 초기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역사가 티투스 리비우스(기원전 59 ~ 기원후 17)가 저술했다. 로마의 창건부터 당대까지 140권을 썼으나 지금은 일부만 전해지고 있다. 1권-10권, 21권-45권이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다. 1권-10권까지는 로마의 건설부터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 로마의 지배권이 확대되는 시기이며, 21-45권은 제 2차 포에니 전쟁부터 다룬다.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 로마사 1권-10권>을 읽고, 자신의 관점에서 역사를 평가한 <로마사론>을 쓰기도 했다. 이번에 출간된 6-10권은 주로 에트루리아 및 삼니움족과 벌이는 전쟁을 다루었다. 이들과 싸워 이긴 결과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다. 우선 로마의 창건부터 10권까지 일어난 주요 사건과 정치적 변화를 보자.
기원전 753년 로물루스의 로마 창건. 정치 체제는 왕정이었다. 로물루스는 원로원 의원 100명을 임명했다. 이들이 로마 귀족의 시초다.
기원전 509년 왕정 붕괴. 공화정 시작. 매년 집정관 2명을 선출 (최초의 집정관은 류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 루키우스 타르퀴니우스 콜라티누스)
기원전 501년 최초로 독재관 지명(티투스 라르티우스, 사비니 족과의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기원전 494년 평민들의 근무 이탈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호민관 제도 창설
기원전 451년 10인회 임명(법 제정을 위해)
기원전 450년 12표법 제정
기원전 444년 집정관 권한을 지니며, 평민도 임명될 수 있는 집정관급 정무관 선출(3명이 뽑혔는데 모두 귀족)
기원전 421년 재무관 숫자가 4명으로 늘어나고 평민에게 개방.
기원전 400년 최초로 평민 출신이 집정관급 정무관에 당선(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칼부스)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이 로마 함락
여기까지가 1권-5권에 나온다. 아래부터 6권-10권에 해당하는 내용이다.
기원전 367년 섹스티우스-리키니우스 법안 통과, 집정관급 정무관직을 폐지하고 다시 예전처럼 집정관 두 명을 선출하되 한 명은 평민 출신으로 한다. 루키우스 섹스티우스가 최초의 평민 출신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또, 토지 소유에 상한선을 두어 개인이 500 유게룸 이상의 땅을 소유하지 못하게 했다. 한편, 신성한 의례를 담당하는 사람 10명 중 절반을 평민 계급에서 선출하는 법안도 통과했다.
기원전 357년 최초로 평민 출신 독재관 임명 (가이우스 마르키우스 루툴루스, 에트루리아와의 전쟁)
기원전 343년 삼니움 족과 전쟁 시작
기원전 339년 독재관 퀸투스 푸블리우스 필로는 평민에게 유리한 3가지 법을 통과시켰다. 첫 번째 법은 시민들의 선포가 모든 로마 시민에게 적용된다. 두 번째 법은 원로원은 민회에서 나온 제안을 비준해야 한다. 세 번째 법은 감찰관 두 자리 중 한 자리는 평민 출신을 선출해야 한다.
기원전 337년 평민이 법무관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기원전 327년 퀸투스 푸블리우스 필로는 집정관 임기가 끝나더라도, 그리스인들을 상대로 한 전쟁이 끝날 때까지 집정관 자격으로 전쟁을 계속 수행했다.
기원전 326년 부채에 의한 노예화 법 조항이 폐지되었다. 리비우스는 이 조치로 로마인의 자유가 두 번째 탄생을 맞이했다고 평가했다.(왕정 폐지로 인한 정치적 자유가 첫 탄생)
기원전 321년 카우디움 협곡에서의 대참사. 삼니움 군대에게 포위당한 로마군이 이우굼 아래를 지나가는 치욕을 당했다. 2년 후 삼니움군을 대파하고 포로로 잡혔던 600명의 기병대를 구출한다.
기원전 312년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도로와 수도교를 건설.
기원전 299년 민회에서 평민 계급에서 추가로 복점관 5인과 대제관 4인을 뽑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원래 귀족만이 “예언을 받는”, 혹은 특정 의식으로 하늘의 뜻을 확인하는 특권을 누렸다.
1. 공화국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전쟁과 전투 이야기는 제외했다. 이 부분을 넣으면 정리하는 의미가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은 전쟁이 이 기간 동안 벌어졌다. 로마는 무자비하고 효율적인 전쟁기계로 잘 알려진만큼 주변 종족이나 국가와의 전쟁에서 거의 대부분 승리했다. 간혹 군을 이끄는 지도자가 실수하거나 방심해서 패배할 때도 있기는 했다. 그러나 로마는 전쟁에서의 패배를 무엇보다 수치스럽게 여기고 빚을 갚고자 와신상담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래서 치욕을 준 상대에게 꼭 설욕했다. 리비우스는 이러한 로마의 상무정신을 높이 샀다. 병사들의 사기를 올리고 적절한 전술을 준비해 로마에 승리를 안겨준 수많은 지휘관이 있었다.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을 신에게 봉헌하는 살신성인을 감행해 로마군이 승리할 수 있도록 했던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다. 비록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자신이 명령한 바를 어긴 아들을 처형한 장군도 있었다. 로마가 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원수에 가까운 사람을 독재관으로 임명한 집정관도 있었다.
리비우스는 이들이 “공화국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하려는 마음가짐”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리비우스가 살던 시대에도 영웅이 많았다. 마리우스와 술라, 율리우스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안토니우스, 그리고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 같은 이들이 공화정 시대의 영웅보다 더 뛰어난 능력을 증명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리비우스는 일관된 기준으로 역사적 인물을 평가했다. 바로 ‘공화국’에 헌신하는 점이다. 라틴어로 공화국을 ‘re publica’로 쓴다. 직역하면 ‘공공의 것’이다. 오늘날 공화국을 뜻하는 republic이 여기서 나왔다. 레-푸블리카는 어떤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 모든 시민이 주인인 공공의 것이란 뜻이다. 이 레푸블리카는 SPQR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Senatus Populusque Romanus의 앞 머리글자를 딴 말이다. 이 말대로라면 로마에서 공화국은 원로원과 로마 시민, 즉 민회를 지칭한다.
리비우스가 살던 당대의 영웅들은 말로는 ‘공화국’을 위해서 살아간다고 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로마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군사 원정이 몇 년 동안 지속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병사들은 자신들에게 승리와 전리품을 안겨주는 지휘관을 마치 왕처럼 따르게 되었다. 술라나 카이사르가 자신을 따르는 고참병사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로마의 영역이 지중해 전체로 뻗어나갔기 때문에 군사원정이 길어지고, 이로 인해 평민들이 경제적으로 몰락하는 역사적 흐름이 군사 독재를 거쳐 제정을 낳았다. 리비우스는 이러한 세태가 로마의 타락이라고 여겼다. 그는 과거 공화정 시절에 ‘공화국’을 위해 자신의 이익과 생명을 돌보지 않은 살신성인의 자세로 공화국을 수호한 이들을 진정한 영웅으로 보았다.
이와 관련해서 리비우스는 재미있는 부분을 9권에 썼다. 6-10권이 다루는 시대가 마침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동방원정 시기와 일치한다. 그는 “만약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침공한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군사덕후 같은 질문을 제시하고 답했다. 리비우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처음의 몇 번 전투에서는 승리할지 몰라도 결국 로마를 정복하는데 실패했을 거라고 예상했다. 매년 두 명의 집정관을 뽑는 로마는 수많은 지휘관과 장군을 보유한 셈이다. 만약 누가 한 전투에서 져도, 다른 장군이 그 패배에서 교훈을 얻어 지휘할 것이다. 용맹과 무용에서도 로마군이 마케도니아군에 뒤지지 않는다. 또, 알렉산드로스는 제왕으로서 혼자지만 로마는 공화국으로서 수많은 영웅을 보유하고 있다. 원정은 길어질 것이고 나이가 든 영웅이 젊을 때의 능력을 잃는 경우도 흔하다. 이런 리비우스의 예상은 훗날 한니발 전쟁에서 그대로 맞아 떨어진다. 고금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장군으로 손꼽히는 한니발을 상대로 리비우스가 말한 그대로 버티고 이겼으니 이 부분이 단순한 흥미거리만은 아니다.
2. 갈등
로마가 아직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도 최강국가가 아니었을 때, 왕정을 타도하고 공화정으로 국가 체제를 바뀌었던 초반에도 귀족과 평민은 대립했다. 문제는 역시 경제적인 부분이 컸다. 로마가 점점 강성해지면서 전쟁도 많아지고 길어졌다. 로마군은 용병이 아니라 시민병이었다. 평민들이 군대에 복무하는 동안은 집안 경제를 돌볼 수가 없었다. 농업국가인 로마에서 건장한 청장년이 군대에 가면 농사를 짓기 어려워진다. 군대에 복무하고 돌아와보니 빚을 갚지 못해 온 가족이 노예가 되는 경우도 생겼다. 여기에 평민은 반발하고 이들을 달래기 위해 호민관 제도 등 여러가지 제도가 생겨났다. 평민의 정치적 성장은 위에 서술한 주요 사건에서 보이듯 점점 커졌다. 집정관, 독재관처럼 귀족이 독점하던 최고위 관직에도 오를 수 있게 되었다.
평민과 귀족의 대립은 매우 심각했다. 평민은 실력 행사를 포함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외적이 쳐들어오는데도 단체로 징집 명령을 어기고 자신들의 요구를 관철하려고 했다. 이처럼 극단적인 대결도 드물지 않았다. 그런데 현대 역사가들은 평민과 귀족의 갈등을 로마가 강성해지는 원동력으로 꼽는다. 극단적으로 치닫는 당쟁이 조선 몰락의 주요 원인이라고 배운 나로서는 낯선 관점이었다. 그런데 정치적 갈등을 새로운 제도나 호민관, 집정관급 정무관 같은 새로운 직책을 만들어 조화시키는 로마의 유연한 대처는 오히려 발전의 에너지가 되었단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평민의 경제적 몰락은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치러야 하는 피할 수 없는 대가였다. 더이상 정치적으로 갈등을 해결할 수 없게 되자 군사독재와 제정으로 정치 체제가 바뀌게 된다.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리비우스를 비롯한 고대 역사가와 현대 역사가 모두 중요한 일로 다루는 이유다.
3. 동맹
로마가 영향력을 키우면서 주변 부족 및 도시들과 맺는 관계의 특징은 동맹이었다. 먼저 로마가 아닌 곳을 점령하면 동맹으로 만든다. 어느 정도 자치권을 인정하지만 군사권, 최고 통치권 같은 주요 권력과 맹주로서의 권위는 로마가 갖는다. 이때 주체가 ‘공화국’ 즉, ‘원로원과 민회’다. 이런 동맹 체계는 훗날 로마가 한니발 전쟁에서 승리한 원동력 및 제국으로 발돋움한 토대가 되었다. 6권-10권은 수많은 전쟁을 통해 이탈리아 반도에서 점차 로마의 패권이 커지는 과정을 다룬다. 이 시기 로마가 겪은 많은 전쟁은 에트루리아와 삼니움처럼 패권을 다툰 전쟁 말고도 기존의 동맹이 배신해 적에게 붙어서 벌인 전쟁도 많았다. 처음 동맹을 맺은 국가나 도시는 로마의 영향력 외곽에 위치하게 된다. 그러므로 로마를 배신하고 로마의 영향력 밖에 있는 다른 국가나 종족과 연합하여 대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로마의 영향력과 권력이 미치는 영역이 점점 커지면서 이들은 로마 동맹 안쪽 깊숙이 위치하게 된다. 그러면 더이상 로마에 적대하기 어렵다.
한니발이 로마로 진군했을 때, 한니발은 로마의 동맹이 로마에 등을 돌리게 하여 로마를 고립시키는 전략을 짰다. 그러나 의외로 로마와 로마 동맹은 탄탄해서 실제로 배반한 곳은 극히 드물었다. 나중에 로마가 제국으로 올라섰을 때에는 속주라는 다른 체제를 도입했지만 이런 동맹 체제는 매우 탄탄했다. 6 - 10권에서 동맹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거나 로마 부족으로 받아들이는 내용이 간혹 나온다. 또, 동맹이 배신하는 경우 가혹하게 응징한 사례도 있다. 시민권과 처벌이라는 당근과 채찍을 활용해 로마는 동맹을 튼튼하게 다졌다.
6권 - 10권의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내부로는 귀족과 평민의 갈등을 해소하기 위해 점차 최고위 관직의 문호를 평민에게 열어주었고, 채무를 탕감하며 이자율을 낮추었다. 외부로는 외부와 계속 전쟁을 벌이면서 동맹을 만들고, 동맹을 튼튼히 하고, 이탈리아 전역으로 패권을 늘렸다. 로마는 점점 강성해지지만 또한 몰락의 단초도 이미 가지고 있었다. 제국의 씨앗도 이미 자라나기 시작했다. 나는 이 시기 로마의 역사를 보면서 정치적 갈등이 그 자체로는 공동체에 해가 되지 않고, 오히려 활력을 더하는 역할을 한다는 점을 새삼 깨달았다.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정치적 갈등을 없애려고 한다면 이는 기득권에 유리하게 약자를 억압하는 결과만 낳을 것이다. 그보다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갈등을 조화시켜 다양성을 보장하고 사회의 활력을 더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런데 대립하는 진영간의 타협만이 능사는 아니다. 군 복무에 따른 평민 자영농의 몰락과 부채 문제는 로마의 패권이 지중해에 미치면서 싼 곡물이 수입되자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공화정의 갈등 조정 체계가 제 역할을 못하게 된다. 새로운 체제가 필요해진 것이다. 제정이 바로 새로운 체제가 되었지만, 평민의 몰락을 기정사실화 한 바탕에 서 있었다. 로마 제국이 짧은 전성기 이후 계속되는 혼란에 빠진 이유다. 평민의 권리와 이익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마치 현대에는 중산층이 몰락해 양극화가 심해지면 사회의 안정성이 흔들리는 경우와 같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를 제대로 평가하기 어렵다. 그러나 과거를 교훈으로 삼아 더 나은 방안을 모색할 능력이 있다. 역사를 알고 숙고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