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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Feb 21. 2020

선량한 차별주의자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병신’, ‘미친 놈’, ‘(장)애자’……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누군가를 욕할 때 흔히 쓰는 말이다. 그런데 이 표현이 장애인이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비하하고 혐오하는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아주 최근에야 알았다. 대부분은 저 말을 장애인이나 환자를 비하하려는 의도가 없이 사용한다고 항변할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저 말들은 누군가를 욕하는, 즉 비하하고 혐오하는 의도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병신’이라고 욕한다면, 그가 장애인처럼 어딘가 정상인과 다르게 하는 행동이 어설프거나, 일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병신’이라고 지칭한다면,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서 열등하다는 뜻이 그 안에 들어있다. 이 책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우리가 비록 남을 혐오하는 의도가 없더라도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구조 속에서 무관심과 부주의로 일어나는 일상 속의 차별에 대해 말한다. 저자는 성, 인종, 신체나 정신의 장애, 국적, 종교, 학력, 직업, 성적 지향 등 우리가 알게모르게 별 생각없이 살아가면서 저지를 수 있는 여러 차별의 사례들을 소개하고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도 살펴본다. 


 이 책은 차별로 인해 벌어지는 결과보다 왜 그런 차별이 나타나는지 탐구하는 쪽에 조금 더 집중한다. 그래서 제목도 <선량한 차별주의자>다. 책을 읽고 쓰는 이 글에서도 차별을 하는 사람으로서 나를 다루려고 한다. 


 나는 대구에서 남자로 태어나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지금은 한의사로 일한다. 국적, 성, 성정체성, 학벌, 직업, 출신지역까지 줄곧 주류에서 머물렀다. 하지만 내가 가진 기득권을 유지하는데 관심을 쏟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왜냐면 나는 문학을 읽으며 다른 삶에 대한 감각을 기르고, 과학과 인문사회학 책을 보고 현실을 통찰하는 바탕 위에서 더 평등한 사회를 지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날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충격을 받았다. 어쩌다 아동학대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왔다. 부모가 자식을 학대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면 아이를 부모로부터 보호하고 사회가 책임을 져야하는데 부모가 아이의 보호자라서 처벌은커녕 아이를 다시 학대한 부모에게 보낸다. 나와 대화한 사람은 당장 법과 제도가 바뀌어서 이런 불합리한 일이 없어져야 한다고 분개했다. 나는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 법과 제도는 사람의 의식을 따라간다, 아직 한국은 부모가 절대적인 아이의 보호자라는 관념이 너무 강하다, 법이 바뀌려면 이전 법령의 장점을 포괄하면서도 단점을 보완해야 하는데 이게 매우 어렵다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말할 때, 한걸음 물러서서 두루 살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상대방이 내가 기득권자라는 표가 난다고 말했다. 당사자에게는 삶 자체가 달린 일이다. 단순한 생존을 위해서라도 당장의 변화가 절실하다. 그런데 나는 느긋하게 변화는 어렵다는 말이나 하고 있다는 거다. 이 말을 들은 당시는 기분이 나빴다. 내가 생각하던 내 모습과 다른, 내가 싫어하고 벗어나고 싶은 모습을 지적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어서 내가 기득권자라는 점을 확실히 증명했다. 나는 지금까지 나 자신을 타인에게 인정받으려고, 나 자신을 증명하려고 크게 노력한 적이 별로 없다. 한국에서 한국인이며 남성이고 이성애자다. 내 학벌이 내 시험성적을 이미 증명했고, 내 직업이 나의 사회경제적 수준을 어느 정도는 드러낸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단다. 자신의 능력과 장점을 어필하기 위해 ‘나댐’과 ‘겸손’ 사이 아슬아슬한 경계를 목숨 걸고 드나들어도 자신을 보게 하기 어렵다. 그리고 쐐기를 박는 말을 들었다. 웹툰 <송곳>에 나온 그 말이다.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 비로소 내가 기득권자의 시선으로 세상을 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왜 내가 많은 책을 읽어도 항상 그대로인지 알 수 있었다. 나는 실제로는 내가 서있는 위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뭔가 새로 알아도 나와는 동떨어졌다 여기고 거리를 둔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랑 상관없으니까.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이렇게 탄생한다. 관념으로는 인권, 평등, 자유를 지향하고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자신의 시선에서 벗어난 사람에게 주의를 돌리지 않고 자신의 입장에서만 세상을 바라본다. 그가 <선량한 차별주의자>다. 바로 나 자신이다. 머리로는 안다. 내 주변에는 나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왜곡과 편향에 빠지기 쉽다고 말이다. 책에 따르면 이걸 알기만 하는게 더 위험하다. 내가 공정하고 객관적이라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여기기 때문에 편향된 생각을 여과 없이 표출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처지에 따라 시야가 좁고 한정되어 있으므로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거나 공정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선량한 차별주의자>는 능력주의의 함정에 빠져있다. 과연 능력에 따라, 일한 만큼 대가를 받는다는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을까? 능력이란 무엇일까?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힘이다. 그 어떤 일이란 무엇일까? 사회가 발전하는데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변화, 또는 이득이 되게 하는 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사회가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가? 또, 누구에게 이득이 되는가? 사회의 주류다. 이처럼 우리가 능력이라고 하는 개념은 중립적이라고 할 수 없다. 사회의 체계와 질서가 주류에 맞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주류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회 자체가 불공정하다. 그러나 주류에 해당하는 사람은 그렇게 구성된 사회가 공정하다 여긴다. 여기서 능력주의가 기울어진 운동장을 강화한다. 주류에게 맞춘 능력이기 때문에 주류가 아닌 사람은 이미 한 수 지고 들어간다. 능력에 따른 분배가 공정하지 않는 이유다. 그러므로 대입 성적에 따라 학벌에 계층이 생기고 같은 학교 안에서도 전형에 따라 위계가 나뉘는 현상은 능력주의가 공정하다는 환상에 따른 것일 뿐이다. 능력 자체가 공정하지 않다. 이와 별개로 성과에 따라 사람을 나눌 수 있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 그런즉, 사회적 약자들인 장애인, 여성, 성소수자, 외국인에게 더 노력해라, 억울하면 출세하라고 말하는 자체가 차별이다. 


 이 책은 차별의 피해자인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 장애인, 난민이 일상에서 어떤 차별을 받는지, 그들이 차별을 받게 되는 구조가 무엇인지, 왜 사회적 주류가 차별을 가하게 되는지 쉬우면서도 체계적으로 서술했다. 언론이나 다른 책에서 사회적 차별의 한 예를 이야기하는 경우가 이제 많아져서 사례 각각이 낯설지는 않았다. 이 사례들을 체계적으로 모아 엮고, 그러한 차별이 어떤 사회적 구조와 심리에서 나타나는지 설명한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그리고 가해자의 책임을 분명히하며 이런 부당한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나와 같은 기득권자가 각성해야 한다는 점을 설득력있게 제시한다.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들불처럼 솟아난 중국(인) 혐오, 트랜스젠더 여성의 숙대입학 반대 사건, 그리고 영화 <기생충>에서 보여준 클라이막스 사건처럼 차별과 혐오는 우리 일상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이 책은 차별과 혐오가 어떤 문제이며, 누가 일으키는지 보여주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왜 차별과 혐오가 공동체 전체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지도 설명한다. 소수집단에 선을 긋고, 배제하며, 주류의 가치관을 유일하게 받아들이는 사회는 금세 활력을 잃고 자멸하고 만다.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많은 사회는 위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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