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예외주의'와 모비딕의 재발견
허먼 멜빌이 쓴 <모비딕>은 1851년,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출간 당시에는 사람들로부터 외면 받았으나, 1920년대 미국 작가들이 극찬을 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 책을 펼치면 우선 많은 페이지에 놀란다. 이렇게 긴 소설이었어? 읽어 보면 다시 놀란다. 아니 실망한다. 기대하던 거대한 흰 향유고래 ‘모비딕’과 벌이는 사투 대신 고래의 생태와 포경산업에 대한 방대하고 지루한 백과사전식 서술이 대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개 이 부분을 줄인 축약본이나 소년문고로 <모비딕>을 만난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원작을 다 읽거나, 혹은 축약본을 보거나 모두 왜 <모비딕>이 19세기 미국 문학의 정점이며 고전으로 칭송받는지 알기 어렵다. 나 역시 처음 읽었을 때, 완독하기 위해 극한의 인내력을 발휘해야 했다. 읽는 자체에만 집중하다보니 어떤 의미가 숨어 있는지 따질 겨를이 없었다. 이번에 다시 읽을 기회가 왔다. 마음 먹고 제대로, 꼼꼼히 읽었다. 재독을 하니 예상보다 훨씬 재밌게 읽었다.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우정, 에이해브의 내면, 포경업이 상징하는 미국 자본주의 등이 눈에 들어왔다. 충분히 즐거운 독서를 할 수 있었다.
<모비딕>이 가장 미국적인 문학으로 손꼽히는 이유가 뭘까? 또, 왜 수십 년이 흘러서 걸작으로 재발견 되었을까? 우선 미국적인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미국적인 문학도 이해할 수 있다. 나는 ‘미국 예외주의’가 미국을 이해하는 첫 걸음이라 생각한다. ‘미국 예외주의’란 “미국이 그 독특한 기원과 국가적 신조, 역사 발전 과정, 정치 및 종교제도로 인해 다른 서구 선진국들과 다르다는 관념”이다. 미국이 유럽과 다르다는 점을 최초로 자세히 고찰한 사람은 <미국의 민주주의>로 유명한 알렉시스 드 토크빌이다. 그런데 ‘미국 예외주의’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소련의 스탈린이다! 당시 미국 공산당은 미국 공산주의는 유럽이나 러시아와 다른 역사 법칙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29년, 스탈린은 이 주장을 듣고 미국 공산당에 이단이 자리 잡았다며 ‘미국 예외주의’라는 표현을 썼다. 스탈린 이전에 엥겔스도 미국에 사회주의 정당이 성장하기 어려운 이유로 이민으로 형성된 노동자 계급 내부가 인종적, 문화적으로 분화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했다. 미국의 가장 큰 경쟁 상대이자 사상적으로 대척에 서 있는 공산주의자들도 미국이 뭔가 다르다는 점을 염두에 두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특별하다는 생각을 독립전쟁 당시에도 가지고 있었다. 실제로 미국의 개척도 이전에 없는 형태의 식민지 사업이었다. 또, 본국의 억압에 저항하여 민주주의 혁명으로 국가를 건설한 면모는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내세운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 개척정신, 개인주의가 모든 인간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흑인 노예와 아메리카 원주민이 미국의 정신 아래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처럼 ‘미국 예외주의’는 태생부터 양면적이었다. 미국이 자신들은 특별하다는 이 정신을 국제 사회에 강하게 내세우기 시작한 때가 20세기에 들어 미국이 초강대국이 되기 시작할 무렵이다. 제 1차 세계 대전에 뒤늦게 참전해 승전국이 된 미국은 전쟁으로 잿더미가 된 유럽 대신 세계 질서를 주도하는 기회를 얻었다. 이때부터 ‘미국 예외주의’는 미국이 특별하게 가진 우수한 점을 세계에 퍼뜨려야 한다는 신념으로 발전했다. 미국의 가치와 시스템이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며, 접해보면 누구나 원할 것이라는 믿음이 뒷받침했다.
‘미국 예외주의’가 긍정적으로 작용하면 성취 지향, 높은 수준의 개인적 책임감, 독립적인 진취성, 자발적인 자원봉사가 활발하다. 반면 부정적으로 작용하면 이기심, 공동선에 대한 낮은 이해, 불평등한 소득분배, 낮은 복지 수준이 사회를 암울하게 만든다. 한편, 미국의 특수한 역사에서 비롯한 미국적 가치가 우수하며 세계에 퍼뜨려야 한다는 생각은 제국주의적 팽창주의에 직결된다. 바로 이 시기에 미국 작가와 지식인이 <모비딕>을 재발견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멜빌이 <모비딕>을 쓴 1850년대는 미국이 미래의 초강대국이 되기 위한 밑바탕을 쌓고 있던 시기다. 이 시기 어떤 작가도 미국만의 독특한 가치관과 신념 체계가 가진 모순을 깊이 다루지 못했다. 하지만 멜빌은 전세계 바다로 뻗어나간 미국의 포경산업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의 팽창과 파괴적 면모를 보았다. 미국이 가진 장점은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인을 보호하며, 독창성을 숭배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멜빌은 자본주의적 효율만을 추구하는 탐욕과 세상을 모두 지배해야 직성이 풀리는 권력욕이 다양성을 무너뜨리고 획일성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멜빌은 <모비딕>에서 내용만으로 다양성을 옹호하지 않았다. 그는 소설의 구조적 측면에서도 여러가지 형식을 도입했다. 시점은 처음 일인칭 주인공처럼 시작했다가 일인칭 관찰자로 변해가다가 나중에는 전지적 시점으로도 변한다. 군데군데 고래와 포경산업에 대한 백과사전적 서술이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때로는 연극처럼 보이는 선원들의 대화와 노래가 나올 때도 있다. 또, 의식의 흐름 기법처럼 몽환적인 내면 심리를 묘사하기도 하고, 철학적인 주제를 한참 논하기도 한다. 그는 주제와 형식을 작품 안에 통합시켰다. 1850년대에 이런 소설은 적어도 두 세대는 앞서 갔다고 볼 수 있다.
주제에서도 이슈메일과 퀴퀘그의 우정이 보여주는 다름에 대한 인정과 존중이 하나의 목표에만 사로잡힌 에이해브의 광기와 대비된다. 사실 자본주의의 발전이 내포하는 탐욕은 광기에 다름아니다. 고래를 포획할 때 안는 위험, 위험을 이겨냈을 때 얻는 막대한 보상, 고래를 죽이고 처분하는 잔인한 과정, 몇 년동안 바다를 떠돌고도 곧바로 다시 포경선을 타는 고래잡이 선원들. 이 모두가 마치 도박판에서 가진 돈을 모두 거는 도박사와 같다.
멜빌은 이미 19세기 중엽에 미국적 가치가 내포한 이중성을 예리하게 포착했고, 이를 형식적인 면에서도 높은 수준으로 구성한 걸작을 쓴 것이다. 20세기에 들어 일군의 미국 작가와 지식인이 <모비딕>을 지지한 이유가 뭐겠는가? 미국이 대외 팽창정책을 노골적으로 펼치기 시작하며 미국적 가치와 사회 체계의 우수성을 퍼뜨리려고 할 때, 그들은 ‘미국 예외주의’의 이중성과 위험성을 눈치챘다. 그리고 그들보다 앞서 이를 지적한 <모비딕>을 재발견하고 칭송하게 된 것이다.
<모비딕>에서 또 강조한 면이 있다. 이슈메일은 고래의 생태와 포경업을 매우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런데 마지막에 그는 자신은 고래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다고 말한다. 이는 인간의 한계나 운명 이런 것을 한탄하는 맥락이 아니다. 아는 것은 권력이며 대상을 지배하는 힘을 가진다. 산업혁명, 과학혁명,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지식과 힘을 주었고,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할 수 있다는 기대 또한 안겨주었다. 이슈메일은 다양성을 옹호하면서 자연에 대한 무자비한 지배 또한 비판한다. 실제로 우리는 자연을 성공적으로 지배하는데 실패했다. 기후변동, 후쿠시마 원전 사고, 환경 오염, 그리고 바이러스 유행처럼 수많은 실제 사례가 있다. 고래에 대해 더없이 자세히 묘사한 후, 아는 바가 없다고 실토하는 태도가 어쩌면 자연에 대한 진실한 자세일 것이다. 우리는 자연을 더이상 지배하는 대상이 아니라 상호작용하며 공존하는 또다른 주체로 보아야 한다. 이슈메일을 통해 멜빌이 전하는 메시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