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감상
드니 빌뇌브가 감독한 영화 <컨택트(원제 : Arrival)>는 테드 창의 SF <네 인생의 이야기>가 원작이다. 영화와 소설 모두 훌륭하다. 주인공 루이스는 언어학자로 지구에 방문한 외계인의 언어를 연구한다. 그녀는 외계인의 언어 구조가 지구인과 달리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표현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녀는 외계인의 언어를 배우면서 자신의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기억’한다. 루이스는 미래에 자신이 결혼을 하고 딸을 낳지만, 딸이 젊은 나이에 사고로 죽는다는 사실도 ‘기억’한다. 나는 자식을 잃는 고통이 얼마나 큰지 짐작조차 못하겠다. 가능하다면 그러한 삶을 선택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기억대로 살아간다. 그녀가 기억하는 미래 그대로 삶을 이끈다. 왜일까?
나는 그녀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의 자아는 그가 살아온 경험과 기억을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녀의 기억이 아무리 미래라도, 미래의 일이 자신의 기억을 이루는 이상, 그녀는 기억에 어긋나는 삶을 살아갈 수 없다. 바로 그 미래가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과거-현재-미래를 동시에 기억한다는 말은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는 의미다. 선형적으로 흘러가는 시간이 우주의 실제 속성이라면 제아무리 뛰어난 외계인이라 한들 아직 존재하지 않는 미래를 어떻게 기억할 수 있겠는가? 이 작품이 보여주는 우주는 우리의 생각과 달리 모든 시간대가 동시에 존재한다. 모든 시간대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그래야만 작품 속의 상황이 논리적으로 가능하다. 이런 시간관을 시간에 대한 4차원주의라고 한다.
이 책 <시간 여행, 과학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지, 가능하다면 어떤 형태가 될 수 있는지를 묻는다. 물리학이 아니라 논리철학의 관점에서 논리적으로 따진다. 그러면서 시간에 대한 여러 관점을 소개한다. 책에 따르면 시간에 대한 관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일반적인 통념처럼 시간이 과거-현재-미래로 흐른다는 생각은 3차원주의라고 한다. 반면, <컨택트>처럼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존재하고,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는 관점은 4차원주의다. 저자는 책에서 시간 여행을 둘러싼 학자들의 여러 논증을 살펴보고, 3차원주의와 4차원주의 사이에서 벌어진 다양한 논쟁을 정리한 후, 자신만의 독특한 시간관을 제안했다. 저자는 기본적으로 3차원주의자인데, 과거-현재-미래라는 선형적 3차원주의가 아니라 이전-이후를 중심으로 하는 관계적 3차원주의를 시도한다. 시간에 대해 더 공부한 후에 저자의 제안도 다시 고찰해 보려고 한다. 한편, 책이 다룬 내용이 너무나 재미있고, 하나라도 놓치기 싫어서 따로 논증과 쟁점을 자세히 정리하기도 했다.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에서 현대 물리학이 밝혀낸 시간의 모습을 소개했다. 제목만 봐도 시간의 4차원주의 관점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카를로 로벨리는 물리학에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는 주장은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통계역학으로 증명된다는 점을 설명한다. <시간 여행>에서도 저자는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시간에 관해서 4차원주의자라고 인정한다. 그러나 우리가 직관을 통해서 본 세계는 도저히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에 존재한다면, 인간의 자유의지나 미래에 대한 가능성은 아무런 의미가 없지 않는가?
나는 <컨택트>를 보고 <네 인생의 이야기>를 읽기 전에는 (당연하게) 시간이 흐르며, 인간의 삶은 자유의지에 따라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을 다룬 SF를 읽으며 과거를 바꿀 수 없다면, 미래를 바꿀 수도 없다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또, 물리학이 밝힌 시간의 속성을 이해하면서 세계가 나의 직관과 다를 수 있다는 점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유의지도 허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인간의 자유의지 개념은 한 사람에게 하나의 단일한 자아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신경과학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단일한 자아가 착각임을 드러냈다. 자유의지는 인간의 본질적 속성이 아니라 의식이 만들어낸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지나간 과거를 바꿀 수 없다. 그러나 과거에 대한 태도와 생각을 바꿀 수는 있다. 자유의지가 아니라 자기인식이 우리의 삶을 의미있게 만든다. 그렇다면 만약 우리가 4차원주의 세계에서 미래를 기억할 수 있게 된다 해도 같을 것이다. 과거를 바꿀 수 없는 미래도 바꿀 수 없지만, 과거에 대한 태도와 생각을 바꾸듯이, 미래에 대한 태도와 생각 역시 바뀔 수 있다. 자유의지가 없다고, 미래에 대한 가능성이 닫혔다고 우리의 삶이 의미 없어지지 않는다. 카를로 로벨리는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의 한계는 우리가 상호작용하는 범위 내라고 말했다. 우리와 상호작용하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의 일부이기도 하다. 결국 우주를 안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아는 것이기도 하다. 이또한 자기인식이다.
시간에 대한 이야기가 결국 자기인식으로 흘러갔다. 인간이 우주를 탐구하는 이유도 우리 스스로를 더 잘 알기 위해서다. 인식의 지평을 넓힌다는 말은 곧, 나의 세계가 커진다는 말이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 시간을 공부하면서 실제 시간의 본질이 무엇인지 규정하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는 점을 깨달았다. 나를 알고,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인식은 결코 내 피부의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 나와 상호작용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로 확장할 수 있다. 나를 아는 일이 곧 세상을 아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