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을 왜 ...
나는 솔직히 워낙 두루두루 겁이 많은 데다 특히 어두운 길도 무서워하고, 고소공포증도 심하다. 그런데 오늘따라 운동을 하자고 함께 나온 남편이 평소대로 늘 돌던 코스(산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이고, 포장된 길이라 걷기도 편하다)로 가기 전에 정상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하지만 전망대까지 한 번 가보자고 했다. 솔직히 내키지 않았다기보다는 정말 가기 싫었지만, 여름이라 아직 사위가 어둡지 않았고, 언젠가 한 번은 올라가야 할 것 같아서 올라가게 되었다. 하지만 몇 발자국을 채 못 뗐을 때부터 내 마음속은 깊은 후회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여보, 우리 오늘은 정상에 한 번 올라가 보자.
-정상엔 왜요?
-안 가봤잖아. 한 번 올라가 보자.
-그게 왜 궁금할까? 난 싫은데.
-가보자.
이렇게 해서 우리는 높지 않은 작은 동산 같은 산의 정상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겁이 많은 데다 쓸데없는 상상력도 풍부한 나는 역시 하지 않아도 되는 상상을 하면서 나 자신과 남편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여보, 여기엔 산짐승 없을까? 나무 사이에 숨을 데도 많아 보이는데?
-장난해? 산 사이즈를 봐. 여긴 산도 아니고 동산이라고.
-그래도 가끔 뉴스 보면 민가에 멧돼지 같은 산짐승이 와서 피해를 입힌 경우가 있던데.
-그건 높은 산이 인접해있는 민가일 경우고. 이건 그런 산이 아니야.
-그런가? 그런데 여긴 다니는 사람이 왜 이렇게 없지? 당신처럼 정상이니 전망대니 하는 데가 궁금한 사람이 별로 없나 보네.
-그게 뭐가 어때서? 정상 금방 나올 거야. 조금만 참아봐.
-그런데 이렇게 올라가다가 날이 어두워지면 어떡해?
-지금 이렇게 환한 데다 지금 여름이라서 해도 빨리 안 져.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가로등 불이 들어오겠지.
하지만 나는 가로등 불이 들어온다는 남편 말을 듣자 더 무서워졌다. 과연 가로등은 몇 미터 간격으로 세워져 있을 것이며, 각각의 가로등은 얼마나 많은 면적을 비출 수 있을지 상상하니까 더 끔찍했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온다면 그만큼 사위가 어두워졌다는 거고, 가로등이 촘촘하게 세워져있지 않기 때문에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어두울 것이며, 가로등 불빛이 닿는 부분보다 안 닿는 부분이 많을 것이라는 것은 깊게 생각해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 펼칠수록 내 심장은 작아져서 개미 심장만 해졌고, 다리는 반대로 무거워져서 코끼리 다리만 해져서 잘 움직여지지가 않았다. 괴상망측한 모습을 한 나는 여전히 남편과 대화를 시도했다.
-여기가 길이 맞는 거야?
-그래, 이리로 올라가면 돼.
-내려갈 때는 어떻게 내려가?
-왔던 길로 내려가거나 반대편으로 내려가면 되겠지.
나는 '되겠지'라는 동사가 이렇게 무서울 줄 몰랐다. 그러니까 남편도 잘 모른다는 거였다. 맙소사. 이 말을 들은 내 심장은 더 오그라들었고, 코끼리 다리만 했던 다리는 이제 공룡 다리쯤으로 변해서 움직이는 것이 더 힘들었다.
-다 왔네. 여기가 전망대야. 우리 결혼하기 전에 딱 한 번 와보고 두 번째로 올라와본 거야.
-아... 두 번째구나... 그런데 어디로 내려가?
-저기 반대편으로 내려갈까?
-저기 엄청 가파른데. 경사가 90도는 돼 보이는데?
-그 정도는 아니야.
정상에 올라온 것이 이번이 두 번째라는 남편이 영 못 미더운 나는 왔던 길로 그대로 돌아가자고 제안했다.
-여보, 그냥 우리 왔던 길로 다시 가자.
-알았어.
-아... 여기 경사도 장난이 아니네.
-내가 잡아줄 테니까 걱정 마.
나는 '잡아줄 일을 안 만들었으면 됐을 텐데'라는 말을 삼키며 얼굴을 잔뜩 찌푸리면서 내려갔다.
-아니, 당신은 이런 산이 뭐가 무섭다고 그래?
-일단 어둡고, 인적도 드물고, 나무가 많은데 나무 사이사이에 뭐가 있는지 다 보이지도 않으니까 무서운 거지. 걷다가 미친개라도 만나거나 괴한을 만나면 어떡해? 우리가 전망대에 올라간 걸 본 사람도 거의 없고 말이야.
최근 들어서 내가 SF 영화와 범죄 영화를 너무 많이 본 것과 내가 소설 번역하는 일을 하는 탓인지도 모른다. 상식이라는 틀을 비집고 일어나는 수많은 비상식적인 행위들과 각종 사건 사고들로 가득한 뉴스 역시 나의 쓸데없는 상상력을 부채질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눈이 크면 겁이 많다는 속설 역시 일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산에서 내려왔을 때 즈음 가로등에 불이 들어왔다.
-저 봐, 여보, 정상으로 올라가는 길에는 가로등도 거의 없네. 캄캄하잖아.
-알았어, 알았다고. 이제 다시는 당신한테 등산하자고 안 할게. 됐지?
나도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고 싶고, 흔들리는 돌다리도 건너고 싶고, 케이블카를 타고도 아래에 펼쳐진 풍경을 감상하고 싶다.
이렇게 오늘도 나는 겁이 많아서 못 하는 행위 하나를 더 추가하며 산에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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