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승주연 Oct 28. 2022

상자 이야기

번역을 하다가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 남편에게 지하철을 타고 아웃렛에 가자고 했다. 평소 같으면 거절했겠지만 요즘 번역 때문에 스트레스받고 있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흔쾌히 가자고 일어났다. 다소 황당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내가 아웃렛에 가고 싶은 이유는 ''가을을 느끼고 싶어서''였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들이라면 ''가을을 느끼러'' 단풍이 예쁘게 든 산에 가거나 전망이 예쁜 카페에 가겠지만 나는 마네킹이 형형색색 다양한 가을을 입고 있는 가을을 느끼고 싶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아웃렛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한 후에 본론으로 들어갔다. 


''여보, 여기도 식품 코너 있겠지?'' 

''그럼, 당연히 있겠지!'' 

''보통 식품 코너는 1층이나 지하에 있으니까 밑으로 더 내려가야 되겠지?'' 

''그럴 것 같은데.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가 안 보이네.'' 

''그래도 조금 걷다 보면 나오겠지.'' 


우리 부부는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미로에서 빠져나가기라도 하겠다는 듯 열심히 1층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를 찾아봤다. 결국 에스컬레이터 대신 엘리베이터를 찾은 우리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발견하기라도 한 것처럼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엘리베이터에 탔다. 처음에 아웃렛에 가기로 마음먹었을 때만 하더라도 내가 느끼고 싶었던 가을은 마네킹이 입고 있는 형형색색의 옷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식품 코너를 찾았을 때 기쁨은 마네킹이 입고 있는 가을을 봤을 때와 비교할 수도 없이 컸다. 그제야 나는 내가 찾던 ''가을''은 ''보거나 입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뱃속에 넣는 행위''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진짜 가을을 느끼기 위해서는 무엇을 얼마나 먹으면 좋을지 생각했다.  과자 코너를 지나고, 활꽃게 코너를 지나려고 하는 찰나에 머릿속에 번개처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그러니까 죽은 생물 꽃게가 아니라 싱싱하다 못해 살아있는 꽃게라면 진짜 가을 맛을 보여줄 것 같았다.  뭔가에 홀린 듯 꽃게가 놓여있던 톱밥 가득한 커다랗고 깊은 쟁반에 다가가자 젊은 남자 직원이 말했다. 


''아주 싱싱해요. 살도 제법 꽉 찼고요.'' 


잠시 사방을 둘러본 나는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어디에 담아주시나요?''  

''비닐봉지에 담아드립니다.'' 


의외의 대답에 당황한 나는 나도 모르게 말했다. 


''아플... 텐데요.'' 


이 말을 한 후에 나는 머릿속으로 꽃게를 들고 가다가 여기저기 긁히고 찔려서 피를 철철 흘리는 나와 내 남편의 모습을 그리고 있었다. 


''혹시 상자 같은 건 없나요? '' 

''잠시만요.'' 


이 짧은 말을 남기고 직원은 안으로 들어가더니 종이로 된 상자, 그러니까 꽃게를 넣어서 배송해온 그 상자를 어렵게 찾아서 저울에 달아본 후 가져왔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상자와 그가 가져온 상자는 재질도 다르고 크기도 다른 데다 그가 가져온 상자를 들고 지하철을 타고 집에 갈 생각을 하니 살짝 아찔했다. 이때 직원이 말했다. 


''상자 무게는 빼드리려고 무게도 재서 왔습니다.'' 


 뒤따라 들어가서 종이 상자를 꺼내고 무게를 재는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가 상자를 찾는 공간은 철저히 직원인 그에게만 허락된 곳이었다.  소리를 지르고 싶다는 강렬한 바람이 솟구쳐 오른 순간 그는 이미 내 앞에 와있었다. 평소 같으면 고맙다고 말하고 그가 건넨 상자에 꽃게를 담아 왔겠지만, 그러기에는 집이 좀 멀기도 했고, 집에 가려면 지하철로 최소 4 정류장은 가야 했다.  나는 순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만약 정말 우리가 종이 상자에 든 꽃게를 들고 지하철을 탄다면 상자를 어떻게 들고 있어야 할지 고민했다. 결국 내 뇌가 직원의 노력을 부정하면서도 기분 나쁘지 않을 말이 무얼지 생각하는 동안 입이 먼저 입을 열었다.  


''저 혹시 투명한 플라스틱으로 된 상자는 없을까요? 많이 안 살 거라서요.'' 


다행이었다. 내겐 그의 노력을 거절할 명분 혹은 명확한 이유가 있었다. 그랬다. 애초에 꽃게를 많이 살 생각은 없었다. 4-5마리를 사서 마지막으로 가을을 만끽하면 그걸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직원도 나를 이해한다는 듯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가 내가 생각한 그런 크기의 플라스틱 재질로 만든 상자를 꺼내왔다. 

이 무렵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감지한 남편이 내 쪽으로 왔다. 


''당신 뭐 하는 거야?'' 

''그게... 내가 상자가 없냐고 물어봤는데, 종이 상자를 가져오셔서.''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플라스틱으로 된 상자 없냐고 물어보지.'' 

''난 종이 상자를 가져오실지 몰랐지.'' 

''하루라도 그냥 넘어가는 날이 없네. 당신을 어쩌면 좋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