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과 착각 사이
난 잠이 많다. 게다가 분석적인 자세를 늘 몸에 지니고 다니는 나는 왜 내가 잠을 많이 자는지, 그것도 거의 매일 숙면을 취하는지, 혹은 숙면에 취하는지 원인을 알고 싶어서 원인이 될 만한 요인들을 따져봤다.
첫째, 나는 AB형이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AB형들이 통상 잠이 많다고 한다.
둘째, 나는 생각이 많다. 잡생각이라기보다는 (남편은 잡생각이 많다고 핀잔을 주지만) 대부분 일과 관련된 생각들이다. 내 머릿속을 차지하는 생각의 이유들은 대충 이렇고, 대부분 일과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것이다.
1) 이번 주에는 몇 페이지를 번역하는 것이 좋을까?
2) 이번 달에는 몇 페이지를 번역할 것인가.
3) 이번 달에는 누굴 만날까?
4) 출판사 대표님을 조만간 만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최대한 늦게 뵙는 것이 좋을까?
5) 점심에는 어떤 걸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6) 하루 일과를 다 끝낸 10시쯤에는 어떤 영상을 보고 자면 좋을까? 영화? 영화라면 어떤 장르? 액션? 코믹? 스릴러? 고딩엄빠를 볼까? 아니면, 미자네 주막을 볼까?
7) 오늘은 운동을 하고 잘까? (집에 자전거가 있다) 한다면 얼마나 할까? 30분? 40분? 1시간? 그런데 오늘 운동할 컨디션이긴 할까?
8) 점심으로 삼겹살을 먹는다면 통삼겹살을 사서 굽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대패삼겹살을 바삭하게 구워서 먹는 편이 좋을까?
9) 봄옷을 한 벌 사고 싶은데, 카디건이 좋을까? 아니면 재킷이 좋을까? 그냥 마트에 가서 보고 결정할까? 그래도 미리 충분히 생각하고 가야 마트에 가서도 잘 살 수 있지 않을까?
10) 남편 몸에서 젖비린내가 나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이 정도 나이에 아직도 그 냄새가 나는 거면 기네스북에 올라갈 일 아닌가?
셋째, 일을 많이 한다. 실제로 나는 보통 2-3편의 원고를 동시에 작업하며 (한 권은 번역하고, 다른 한 권은 번역본과 원본을 대조하며, 나머지 한 권은 역자교를 보는 식이다), 대학원 박사 과정에 다니고, 또 다른 작품 기획을 준비한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나는 잠이 많고, 꿈도 꾸지 않고 숙면을 취한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꿈을 많이 꾼다. 한 번은 머리를 시원하게 감은 꿈을 꾼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꿈이라는 것이 정말 현실과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으면 왜곡된 현실과 교묘하게 섞어서 그런 꿈을 꾼 것이라고 생각할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그래도 일단 꿈 해몽을 찾아봤다. 굉장히 좋은 꿈이었다. 하지만, 내가 만약 정말 꿈을 꾼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한 행동을 꿈과 연결시켰다면? 집 밖을 잘 안 나가는 시기에는 머리를 잘 안 감는 내가 (보통 그럴 경우 3일에 한 번 머리를 감는다) 자면서 머리를 아주 시원하게 긁었고, 그 느낌이 너무 좋았으며, 긁으면서도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면? 확인이 필요했다. 남편은 잠귀가 밝으니 내가 정말로 머리를 긁었다면 그 소리에 잠에서 깼을 거고, 기억도 할 것이다. 진실을 알고 싶은 마음에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나 어제 머리 감는 꿈을 꾼 것 같은데. 진짜 그런 꿈을 꾼 건지, 머리를 너무 시원하게 긁어서 그렇다고 느낀 건지 잘 모르겠어.''
''당신 자면서 머리 긁을 때 있어. 제발 좀 그러지 마.''
''아니, 그러니까, 어젯밤에도 내가 긁었어?''
''그럴지도 모르지.''
이렇게 나의 마지막 희망은 흐지부지 사라졌고, 나는 영영 그날의 진실을 알 수 없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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