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튜브 채널을 즐겨 듣는 편이다. 자동차로 출퇴근하면서, 아침이나 저녁으로 운동하면서 도움 되는 유튜브 방송을 찾아 듣는다. 두 달 전쯤, 야간에 아파트 헬스장에서 운동할 때에도 이어폰을 꽂고 유튜브를 틀었다. 때마침 경제방송 삼프로TV에 전 개그맨이자 배우이자 사업가이자 최근 독서전도사이기도 한 고명환 작가의 신과대화 영상이 올라와 있어서 그걸 듣게 되었다. 고명환 작가가 본인의 경험, 사업 솔루션, 독서 얘기를 하면서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명예교수가 인간의 문명을 물건, 제도, 철학이라는 세 개의 층으로 정의한 것을 거론하며 여기에 자신의 생각을 덧붙여 말하는데 나도 모르게 솔깃하며 빠져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dKYFs8Gl_FY&t=1672s
요약하자면, 물건과 제도와 철학 중 당신의 시선은 어디에 머무르고 있는가 하는 거였다. 예를 들어 낮은 단계인 물건을 파는 데만 시선이 머무르는 수준이 있고, 다음으로 시스템과 제도까지 시선이 다다른 수준이 있고, 가장 높은 단계인 철학까지 담아서 파는 수준이 있다는 거였다. 나이키는 단순 스포츠용품을 파는 게 아니라 ‘Just do it’이라는 철학을 파는 회사이고, 노티드 도넛은 도넛만을 파는 게 아니라 고객에게 행복을 팔아야겠다는 철학을 담았다는 거다. 러닝머신을 빠르게 걷던 나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왜냐하면 ‘철학, 이거 딱 우리 회사 이야기하는 거잖아.’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2023년 기준 전 세계 191개국 53만 1000명의 직원과 1억 5600만 명의 자원봉사자가 활동하고, 국내만 해도 4,300여 직원과 11만 1000명의 봉사원, 254만 명의 헌혈자가 참여한 적십자는 과연 어떤 철학으로 일하는 회사일까? 바로 ‘인간의 생명과 건강을 보호하고 고통을 덜어주고 예방하기 위해’ 존재하는 인도주의 기관이다. 적십자의 철학과 대한적십자사가 하는 일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 하나씩 들어가 보자.
첫째, 적십자사는 구호사업과 사회봉사사업을 한다. 적십자는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차별 없이 돕겠다는 열망에서 태어났지만, 우리를 위협하는 것은 비단 전쟁만이 아니다. 기후변화와 사회환경의 변화로 인한 재난도 있다. 그래서 평상시 재난 예방과 대비 능력을 강화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적십자는 왜 이런 일을 할까? 구호활동이 인간의 생명과 고통과 관계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을까? 훈련된 자원봉사자가 잘할 수 있다. 그래서 전국 각 지역에 조직을 갖추고 봉사회를 조직하여 봉사원을 교육하고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봉사자들은 평시에는 어려운 지역민을 돕는 봉사활동을 한다.
둘째, 적십자사는 안전지식 보급을 한다. 응급처치법과 수상안전법. 응급처치법은 언제 어디서나 불의의 사고를 당했을 때 의사에게 운송되어 치료받기 전까지 초기단계에서 생명을 보호하는 활동이다. 우리나라는 1948년 3월 조선적십자사 시절 당시 미국적십자사 응급처치법 교육자료(American Red Cross First Aid Textbook)를 번역하여 이를 교재로 응급처치법을 보급한 것이 국내 응급처치법의 효시다.
또한 해마다 여름철이면 물놀이 사고로 생명을 잃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 수상사고 예방에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된다. 1953년 4월 8일부터 10일까지 당시 국내 미국적십자사 극동지구 안전과장 코론(Colon)을 초청하여 수영연맹회원과 대학생 등 30명에게 국내 최초로 수상안전법 강사 강습회를 진행한 것도 대한적십자사가 한 일이다. 지금도 여전히 적십자는 응급처치법, 심폐소생술, 수상안전법 교육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데, 이 모두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교육이기 때문이다.
셋째, 적십자사는 혈액사업을 한다. 안전한 혈액을 안정적, 효율적으로 공급하여 환자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는 일. 외국으로부터 수입하지 않고 혈액을 자급자족하기 위해선 헌혈자 300만 명이 필요한데, 수혈이 필요한 환자들의 건강과 생명을 보호할 수 있는 혈액제제는 오직 헌혈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다. 1958년 2월 국립혈액원을 인수해 대한적십자사 혈액원으로 개칭하며 혈액사업을 이어온 이래로 적십자는 국내 혈액사업을 크게 발전시켜 왔다. 그리하여 혈액사업은 오늘날 적십자를 대표하는 사업으로 국민들의 마음속에 자리매김했다. 이 또한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고통을 줄여주는 일이다.
넷째, 적십자사는 공공의료사업으로 병원사업을 한다. 대한적십자사는 1905년 병원사업으로 시작했다. 적십자병원은 해방 이후 우리나라 공공의료 발전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으며, 특히 서대문 서울적십자병원은 우리나라 최초 전공의 수련병원이라는 자랑스러운 역사도 가지고 있다. 1980년대 국민 의료보험이 시행되기 이전에 취약계층을 위한 의료공백을 메우며 전국 13개 병원까지 운영되었으나 현재는 서울, 인천, 상주, 거창, 통영, 영주 등 6개 도시에서 의료사각지대에 놓인 취약계층의 건강증진을 위해 7개 공공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의료사업은 인간의 생명을 보호하고 고통을 줄여주는 대표적 활동이다.
다섯째, 청소년적십자(RCY) 사업을 한다. 인간의 존엄성을 높이고 생명을 살리며 고통받는 이들을 돕는 적십자의 정신이 곧 인도주의다. 미래사회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이 인도주의 정신을 배우고 이를 통해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한국전쟁 중인 1953년 4월 5일 부산 암남동 뒷산에 1만 그루 나무를 심는 활동으로, 단원 200명으로 시작된 청소년적십자는 그사이 수많은 단원과 지도자들이 거쳐 갔으며, 2023년 기준 전국적으로 110,000명의 단원이 활동하고 있다. 안전교육 습득, 봉사활동 실천, 국제 교류, 인도주의 학습 등 가슴 따뜻한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하고 있다.
이밖에도 전쟁으로 헤어진 가족들을 찾아주는 이산가족사업 등 남북교류사업, 국제 긴급구호와 재건복구 및 해외개발협력 등 국제활동, 원폭피해자‧사할린동포 지원 등도 고통받는 국내외 이웃의 아픔을 줄여주기 위한 활동으로 대한적십자사가 하는 일이다. 게다가 희망풍차라는 이름으로 아동청소년, 고령자, 이주민 등 복지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위기가정 2만여 세대를 지원하는 일도 한다.
적십자가 이처럼 다양하게 하는 일에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줄곧 이어져 온 일도 있고, 시대의 요구에 따라 만들어졌다가 축소되고 사라진 일도 있다. 결국 그 시대의 생명과 안전과 관련된 문제가 적십자가 중요하게 다루는 일이기 때문이다. 혹자들은 적십자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적십자는 전 세계적인 그리고 국내에서 전국적인 시스템을 갖추고 구호로, 봉사로, 헌혈로, 의료로, 안전지식 보급 등으로 당신 가까이에서 계속 활동하고 있으며, 당신께 다가가려 한다. 앙리 뒤낭이라는 한 사람의 간절한 희망에서 시작된 일이 이렇게 커다란 운동체로 100년 넘게 살아서 움직이고 있다니 신기하고 놀라울 따름이다. 이 모두가 철학이 바탕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