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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다움 Dec 10. 2023

뭔가 중요한 날인 것 같은데, 뭐였더라?

내가 나에게 보내는 신호를 알아채기

  2023년 11월 31일에서 12월 1일로 넘어갈 때, 뭔가 중요한 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25일 크리스마스는 아직 많이 남았고, 12월 초에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는데 그게 뭐였더라를 계속 되뇐다. 헤어진 남자친구 생일처럼 내 세포에 강렬히 각인된 의미 있는 날이었는데 이제는 희미해져서 그 이유를 모르는 듯한 느낌. 여느 때처럼 널브러져서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내 몸을 맡긴 채 영혼 없는 표정으로 휴대폰을 볼 때였다. 갑자기 눈이 번쩍하며 12월 초의 중요한 일의 정체를 영상과 쇼츠를 보며 깨닫는다. 바로 BTS 진의 생일이 12월 4일이었던 것이다.

  BTS 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미 모두의 월드스타이지만 나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한참 내가 우울의 절정을 달리고 있을 때, 그는 완성형 미모, 성장형 캐릭터, 심금을 울리는 음색이란 완벽한 삼박자로 나의 축 쳐진 입꼬리를 한껏 끌어올려주는 마법 그 자체였다. 그렇게 한참 늦은 덕질(?)을 하고 있던 차에 난 미국에 오게 되었고 BTS 진 님은 군대에 갔다. 그래서 남들은 미국에서 한국 생각이 나면 김치 등 한국음식을 먹으며 향수를 달랜다지만, 난 한국에서 소중히 모셔온 몇 장의 포토카드를 내 책상에 놓고 영상을 보며 내 헛헛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근데 그마저도 아꼈던 것 같다. 한국, 미국 상관없이 멀리서 바라보는 스타와 팬인 것은 매한가지인데, 그가 무대에 없고, 나는 한국이 아닌 미국에 있다는 게 더더욱 거리감이 느껴졌다. 그래서 진짜 한국이 그리운 날에만 BTS 영상을 간헐적으로 아껴서 봤다.

미국 도서관에서 발견한 반가운 책.

   그러다가 문득 ESL 영어 작문 시간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쓰라는 게 있었는데 내 미천한 영어실력으로 BTS 음악 듣는 것을 가장 좋아한다고 쓰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던 원어민 선생님은 웃으시며, "넌 이제 십 대가 아니잖아. 그런데 이런 보이밴드를 아직도 좋아한다고?" 하며 재밌다는 듯 얘기를 건넨다. 

  그 순간, 평소 영어시간엔 강제로 침묵형 캐릭터를 고수해 왔는데, 갑자기 돌변하여 BTS의 장점에 대해서 늘어놓기 시작한다. 내 영어실력은 마음을 그대로 대변하지 못하고 몇 가지 내가 자주 돌려쓰는 단어(Beautiful, Amazing)들만 잔뜩 늘어놓으며 엄지 척을 한다. 하지만 영어작문시간인 것을 잊지 않으며,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이라도 하는 것처럼  이렇게  문장을 추가한다. "비록 난 이제 십 대가 아니지만,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어려지는 기분이다"라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브런치 스토리 에세이분야 크리에이터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에 더욱 열심히 글을 써보고자 마음은 먹었지만, 오히려 행동은 노트북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뭘 먹어도 입안에 모래가 굴러다니는 기분이고, 그마저 억지로 먹으면 체하기 일쑤였으며, 잠은 깊게 자지 못하는데 계속 누워서 겨울잠 청하는 동물처럼 이불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제는 안다. 내 일상이 무너지기 시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몸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이 보내는 신호라는 것을. 특히 일조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추위에 몸이 저절로 웅크려지면 내 마음도 같이 쭈그러들기 시작한다. 예전엔 그럴 때 '왜 그럴까?'에 집중해서 뭔가 내 안의 문제점을 찾아 고치려 했지만, 이제는 '그럼 어떻게 할까'에 집중해 본다. 루틴은 유지하되 조금 유연성을 부여해 보는 것이다. 매일 새벽 5시에 가던 운동을 오전 10시로 바꾸고, 한번 하면 바닥에 드러누울 정도로 힘들었던 운동수업 대신 어르신 대상 운동강좌를 신청해서 가볍게 1시간 운동한다.

  억지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평소보다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특히 시작과 마무리가 힘든데, 이럴 때  필요한 마중물 같은 게 바로 나에겐 BTS의 음악이다. 십 대가 아니지만, 마음만은 십 대로 돌려놓는 기적. 하루종일 생산적인, 쓸모 있는 일을 안 했다고 나를 자책하기보다는,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며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고 나에게 좀 더 친절하게 대해줘 본다. 이렇게 또 버티다 보면 또 맑고 따뜻한 날도 올 거라는 기대와 함께.

   아마 연말이 다가와서 더 압박감을 느끼는 것 같다. 어느새 미국에 온 지도 1년이 다 되어가는데, 뭔가 가시적인 성과가 없는 것 같아 초조하다. 여전히 영어라는 장벽 앞에 순식간에 작아지는 순간들이 부지기수고, 호기롭게 도전한 작사는 마무리조차 못하는 일도 발생하며, 친구 같은 엄마를 지양했다가 호구가 되어버린 것 같은 기분에 좌절감이 든다. 그럴 땐 나 스스로를 죄어온 사슬을 내려놓는다. 지금도 충분하다고 토닥여준다. 나를 옭아매는 오랜 신념의 밧줄들을 가위로 끊, 반대의견을 제시해 본다.

- 여전히 영어로 의사소통하는 게 힘들다 -> 솔직히 모국어인 한국어도 더듬거릴 때가 있는데 외국어인 영어 좀 헤매는 게 대수냐며, 어쨌든 미국에서 생존하는데 필요한 영어는 다 하고 있지 않는가.(챗 GPT와 함께라면 교환,환불도 가능) 이 정도면 괜찮다.

- 작사하는 게 시간낭비가 아닌가? -> 작사 채택이란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고 작사를 하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건가? 채택은 행복, 불채택은 불행이란 이분법적 사고를 내려놓고, 결과보단 과정에 집중하면 어떤가. 아직 나에겐 무수히 많은 기회들이 있음을 기억하며, 부담없이 그냥 계속해본다.

- 나는 과연 좋은 엄마인가? -> 좋은 엄마가 어떤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만하면 적당히 괜찮은 엄마이다. 매일 곁에서 필요한 순간에 적절한 대응을 해주기 때문이다. 이제는 갓난아기들이 아니니 과도한 요구는 거절하고, 조금씩 스스로 하게 내버려 두기도 해 본다.

 이렇게 당연한 듯 내 머릿속에 굳어진 신념과 생각들을 하나씩 깨부수고 그 자리에 나에게 따뜻한 말들을 채워본다. 다른 누구의 인정이 아닌, 스스로를 어여삐 여기며 토닥거리는 그 마음을 일부러 가져본다. 그렇게 바람 빠진 인형처럼 쪼그라진 내 마음에 바람을 불어넣어 본다. 아직 멀었지만, 반드시 올봄바람을 기다리며.


  

덧. 사실 매년 12월 4일만되면, 매번 뭔가 놓친듯한 느낌을 받고 그게 BTS 진 님의 생일임을 알고 나선 혼자 빙그레 웃곤 한다. 내 아들 생일 기억 못 한 거보다 더 미안한 마음으로 호들갑을 떠는 내가 웃기기도 하고, 고리타분한 일상에 심장이 뛰는 일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다. 생산적이지 않은 일 같지만, '보이지 않는 손'이 되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고 에너지가 돼준 방탄소년단을 응원한다.  

  올해를 기점으로 멤버 전원이 군대에 가기에 당분간 활동을 볼 수 없지만, 다시 무대에 설 그날을 벌써 그려본다, 마치 한겨울에 따뜻한 봄바람을 기다리는 지금의 나처럼. 얼마 전 라이브 방송에서 그들은 팬들에게 요청하는 '기다려 주세요'가 아니라, 내가 주어가 되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나 역시 애둘(가끔 어머님 아들까지 하면 셋)과 미국생활이 마치 군대에 온 듯 절박한 상황의 연속이지만 미국에서의 생활을 무사히 잘 마치고, 1년 후에 지금보다 더 성장한 나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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