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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rng Aug 15. 2023

[단상] 길 위에서,

어디로, 얼마나, 어떻게 가는가,

#죽음, 


외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향년 90세. 

흔히들 말하는 호상이다. 

문상 온 손님들은 거의 없었다. 내가 가 본 장례식장 중 가장 없었다. 

이윽고 환갑 무렵이 된, 중소기업을 다니다 퇴직하여 자영업을 하는 외삼촌은 딱히 부를 사람이 없었다 하고, 

어느덧 칠순이 되어 친구들이 모두 은퇴하고 거의 유일하게 직장을 다니는 아버지께서는 괜히 알리면 서로 부담스럽고 미안하다고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넓지 않은 장소였지만 가족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 


외할머니는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26년을 홀로 사셨다. 

분명 나의 유년기 시절에는 3층짜리 주택의 2층에 좁지 않게 사셨는데,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쩌다 방문한 외할머니집은 반지하에 가까운 단칸방이었다. 시멘트에 타일이 덕지덕지 붙은 조잡한 부엌과 변기가 쪼그리고 있는 화장실을 겨우 가진 전형적인 단칸방. 좁은 방 안에는 온갖 짐이 구석구석 있어 겨우 누울 자리만 있었고, 오래된 가구는 고풍이 아닌 고물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잘 모른다. 

아들과 딸, 그리고 손자/손녀까지도 아파트 혹은 주택에 번듯이 살지만 왜 외할머니는 그렇게 사셨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고, 그동안 크게 궁금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돌아가시고서야 궁금해졌다.  왜일까, 

납골당에 고이 모실 때, 외삼촌이 울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엄마 돌아가시고서야 에어컨 나오는데서 시원하게 계시네." 

왜일까, 궁금했지만 마치 나도 책임이 있는 것만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명복을 빌 뿐이다. 

그저, 면목이 없을 뿐이다. 



#확신, 

2년 전 선택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은 없지만 더욱 확신을 가지게 해주는 사건이 벌어졌다.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아니 드라마도 이 정도로 후지진 않지. 

날 구렁텅이에서 구원해 준 신께 깊이 감사드린다. 

신의 존재에 대해 긴가민가 하며 살았지만, 내 운명을 구원해 준 일련의 사건과 이후의 만남을 보면 신은 분명 존재함이 틀림없다. 

매일매일 감사하며 살아야겠다. 

그런 의미에서 혼신의 힘을 다해 더 잘해야 한다. 



#변화, 

12년 동안 한 분야에서 일했지만 이 분야 안에서 유일하게 못? 안? 했던 일이 있다. 

잘해도 본전이고, 정답도 없고, 오퍼레이션은 많고, 티도 안 나고, 당연한 일처럼 보이는 일. 

윗사람이 바뀔 때마다 철학이 바뀌고 방향성이 바뀌고 내용이 바뀌는 일. 

사실 누구도 하려고 하지 않는 일이지만, 거의 자원했다. 

미래도 딱히 보이지 않고, 그렇다고 다른 일을 찾을 의지나 용기도 없고, 이 안에서 조금이나마 변화를 주고자 한 선택. 

사실 골똘히 생각할 일도 없다. 

뭘 할지는 위에서 다 정해주므로. 매끈하게 실행만 잘하면 된다. 

케세라 세라, 



#걷기, 

요즘 운동을 등한시해 찌뿌둥한 탓에 자전거, 등산, 걷기 중에 고민하다 걷기를 선택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시작된 걸음걸음, 

10km를 넘어가서야 제대로 된 '생각'을 하며 오랜만에 브런치에 글을 남겨야겠단 생각을 했다.

그전에는 어디로 가지? 이 동네는 왜 발전이 안 되지? 이 길이 맞나? 이 쪽으로 쭉 가면 될까? 지금 돌아가면 몇 km쯤 걷는 걸까? 이 동네는 아파트 덕에 천지개벽했네? 왜 여긴 거지? 몇 보쯤 걸었을까? 옷에서 냄새가 나는 건가? 지금쯤 물을 마실까? 얼린 물은 얼마나 녹았을까? 저 중딩들은 왜 이 시간에 돌아다니지? 다음에는 이 길로는 안 와야겠다. 영등포 청과시장은 중간 상인들일 텐데 여기서 과일을 사는 사람은 왜 누구고 왜 가락시장 같은 곳에서 안 사지?  저 외국인 노동자는 얼마나 받을까? 일을 잘하면 돈을 더 주는 걸까? 어? 저 사람 아는 사람 같은데? 아니네.. 등등

쭈욱 나열해 보니까 '생각'은 있었으나, '깊은 상념'이 없었다.   

때로는 길 위에서 한 껏 스토리텔링을 하고 싶을 때가 있다. 

어쩌면 그게 오늘은 아니었던 것만 같다. 

또  길 위에 선다면, 

짐짓 잠겨보아야겠다, 고요히, 상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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