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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순이 Mar 23. 2022

준 고령자 독일 재취업 성공기

지푸라기같은 인연에 힘입어

 이베이에서 작은 물건을 하나 팔았더라도 나는 애프터 서비스를 확실하게 해준다.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반송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중고거래더라도 반송을 받아준다.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다.


전 회사에서 연락이 왔다.  인수인계제대로 안된 부분이 있어서 그러니 좀 와달라고. 나는 애프터 서비스를 해주기 위해 하루 시간을 내서 전 회사를 찾았다. 만나면 반가울 얼굴들을 위해 도나쓰까지 한 박스 사서. 전 회사에서는 내 퇴직사유가 이직이 아니라 휴식이었으므로 충분한 휴식뒤에 어쩌면 복귀하지 않을까 생각하는 눈치였다. 때마침 장기근속한 여직원 하나가 임신으로 인해 휴직을 하게 되어 회사일을 두루 잘 아는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회사는 나의 복귀의사를 타진했다.


못먹어도 Go.


내게는 물고기 습성이 있다. 웬만해서는 왔던 길 되돌아가지 않는다.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뭔가 좀 이상하다고 느껴져도 뒤돌아 가기보다는 계속 나아가는 것을 택하는 편이다. 그래서 헤어졌다 만났다를 반복하는 연인들과 이혼후 전 배우자와 재결합하는 커플들을 보면 나름대로의 이유야 있겠지만 내 스타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보니 전 회사로 복귀하는 일은 내가 장기 실업자가 되어도 못한다. 다시 못이기는 척 들어갈 거였다면 이렇게 나오지도 않았다.


호기롭게 얘기했지만 내 상황이 꽃가마를 기다리는 처지가 못되었다.  한국에서는 50대 초중반을 준 고령자로 부른단다. 그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거울을 보니 얼굴이 말해준다. 나는 준 고령자, 그것도 여자에다 외국인이다. 최악의 조건을 두루 갖추었다. 당연히 여자 준 고령자를 거들떠 보는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남편이 직장생활을 하고 있으므로 까짓거 좀 쉬면 어떠냐 싶겠지만 나는 알차게 쉬는 법을 알지 못한다. 목표없이 일을 수행하지 못하고, 목적이 없이는 나다니는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목적과 목표가 없으면 나는 폐인이 된다. 이런 내가 장기 실업자가 된다면 나의 몸뚱아리와 장기들은 녹이 쓸어 어느틈엔가 병이 들 것이다.


이제 놀만큼 놀았다고 생각될 어느날, 전화연락을 하나 받았다.


동종업계 회계직원이 육아휴직에서 돌아온 후 내게 전화를 걸었다.(그는 내 전화번호를 몰라서  회사 전 동료에게 물어보았다고 함) 좀 놀랐다. 내게 사적으로 연락을 하다니. 근무중 전화통화를 한 것은 여러 번이지만 직접 대면한 적이 없는, 그야말로 업무적으로만 아는 사이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반가웠다. 그는 워낙에 붙임성이 좋아 전화통화 몇 번에도 이미 친한 것 같은 느낌을 주는 사람. 두번째 전화통화에서 낯을 가리는 내가 이미 그의 성이 아닌 이름을 불렀으니.(나는 8년동안 동료로 지내면서도 꿋꿋히 성을 부르는 동료들도 많았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내게 취업을 제의하고자 전화한 것이었다. 정말 몰랐다. 이런 실오라기 같은 인연이 나같은 준고령자에게 재취업의 기회를 가져다 줄줄은.


나의 인간관계를 보자면 황무지와 같다. 내 사전에 인맥관리 같은 건 애초에 없다. 나를 집어 올리면 주르르 딸려 올라오는 그 모든 것들을 싫어해서 사람관리는 없거니와 동식물 관리도 안한다. 오로지 자식관리 하나 겨우 하며 산다. 그런 성격이다보니 주변이 단출하다. 친구도 거의 없고 교회나 절에 나가지 않으니 지인도 없다. 자식때문에 맺어진 인연으로 학부모 몇 하고만 겨우 연락하고 산다. 이리하여 내가 인맥으로 취업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한 적이 없다. 동종업계의 얼굴도 모르는 그 회계직 직원은 자신의 회사 회계를 맡아주는 회계법인에 나를 소개시켜줬다. 그것도 회사에서 구인광고를 올리기 직전에 시간도 절묘하게 딱 맞춰서.


그 회사에서 사람을 뽑는다길래 조건이 너무 좋아서 사실은 내가 들어가려고 그랬거든.(농담의 웃음) 때마침 그만뒀다는 소식을 들어서 한 번 지원해 보라구. 풀타임이든 파트타임이든 본인이 원하는 대로, 회사에서 직원이 원한다면 교육도 다 지원해준대.



이리하여 면접을 보게 되었다. 동종업계의 그 회계직 직원이 나에 대해 꽤 좋게 얘기해줬는지, 아니면 회사에서 나를 쓸만하게 봤는지, 어쨌든 나는 일사천리로 그 회계법인에 취업하게 되었다.


이참에 나는 인연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인맥이 얇디 얇아 그동안 나는 누구의 덕을 보고 산 적도 없었고 누구를 도와준 적도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남에게 폐끼치는 것을 싫어해서 대부분의 일을 혼자 힘으로 다 해왔기 때문에 도와달라고 쉬이 손내미는 사람들을 보면 남한테 부탁하는 일이 저리 쉬울까 싶을 정도다. 이런 성격 탓에 나는 늘 타고난 내 그릇이 작아서  횡재수도 없고 남의 덕을 보는 일도 없을거라 생각하고 살았다. 이런 내가 누구의 덕을 봐서 취직을 하게 되다니... 준 고령자의 취업을 성사시켜준 동종업계의 그 회계직원에게는 첫 월급을 받은 날 감사의 선물을 톡톡히 할 셈이다.


이제 곧 출근이다. 출근을 목전에 두고 감사의 말씀을 드릴 데가 있다. 그동안 편히 놀고 먹을 수 있게 따박따박 통장에 실업급여를 꽂아준 독일 노동청에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든든한 실업급여가 있어 부모님께 퇴사했다는 말을 안할 수 있었고 용돈도 계속 드릴 수 있었다. 노동청에는 따로 준비한 선물이 없다. 내가 그간 근무하며 낸 실업 보험료가 상당하니 그것으로 감사의 선물을 대신하려한다.


내 영혼에 휴식이라는 따뜻한 닭고기 수프를 잔뜩 먹여놨으니 이제 심기일전 일해서 따박따박 세금을 내겠다. 고맙다 노동청, 고맙다 독일!



사진자료> alamy.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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