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순이 Aug 24. 2022

독일어 Telc C1 합격기

과거운에 관하여 한 마디 하자면

베를리츠 어학원에서 시험결과가 나왔으니 쯩을 받아 가라고 메일이 왔다. 아니, 요새 누가 시험 결과를 보러 하루 휴가를 내서 학원을 찾는담... 우리나라 같았으면 합격증은 이메일로, 합격소식은 문자로 보냈을 것이다. 독일은 정말 아날로그적이라니까... 게다가 시험본지는 두 달정도는 된 것 같은데.


어쨌든. 시험을 준비할 당시만 해도 죽기살기로 준비해서 합격하고야 말겠다는 결기가 있었는데 회사일에 찌들어 가면서부터는 대체 이따위 시험결과를 누가 알아준다고 미친듯이 준비했을까 싶게 심드렁해졌다. 어느덧 내게는 Telc C1 합격증보다 Mandantenbrief를 정확하게 쓰는 일이 더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나는 하루 휴가를 낸 김에 옛 직장동료 지나를 만나 태국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하였다. 어느덧 내 마음은 시험 결과보다 오랜만에 만날 지나 생각에 들떠있었다.


 떨어지거나 말거니... 그깟 종이 쪼가리 하나.


베를리츠에 들려서 시험결과를 가지러 왔다고 했더니 직원이 내 서류를 찾으면서 합격하셨네요! 축하합니다! 하고 인사를 건넸다. 나는 워낙에 기대를 안하고 있었기 때문에 의외의 결과를 맞이한 것처럼 어리둥절했다. 떨어지거나 말거나 했지만 합격의 기쁨은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점쟁이가 맞았어! 난 역시 과거운이 좋은가봐!

어학원을 나와서 합격증을 만끽할 양으로 아예  빵집에 자리를 잡고 앉아 시험 점수를 꼼꼼히 체크했다. 봤던 곳을 또 보고, 또 보고 했다.


생각보다 점수가 꽤 괜찮게 나왔다. 그중 쓰기 점수는 48점 만점에 40점을 받았다. 우리 밤나무 반 독일어 선생님은 웬만큼 잘해서는 쓰기 40점이상 받기가 어렵다고 했는데... 게다가 평소 나의 쓰기시험에는 선생님의 밑줄쫙과 코멘트로 가득하여, 이거 원... 30점이나 받을까 싶었는데 40점이라니! 어쨌든 우리 밤나무반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겁을 준 것은 확실하다.


너, 그따위로 하다간 불합격이 불보듯 뻔하니 더 노력햇! 너희중 절반은 불합격이야. 그러니 미친듯이 숙제햇! 그따위로 토론하면 B1 수준도 안돼. Was hältst du davon이야 von von von! 숙어 달달 외워!


이러지 않으셨나요? 혹시...


어쩌면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겁을 줬다는 것은 나의 상상일 수도 있겠다. 우리반 선생님이 약간의 카리스마를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학교에만 가면, 선생님 앞에만 서면 어떤 종류의 선생님이건 상관없이 주눅이 들지 않는가. 그리하여 선생님의 작은 질책에도 나의 잘못을 극대화시켜 스스로를 채찍질 하지 않았던가...


 더 잘해! Davon이라잖아. Dafür가 뭐니, 이 바보같은 것! 중요한 전치사를 틀리고 앉았어! 쓰기 숙제에서 왠종일 걸리더라도 다음에는 sehr gut! 받아. 안그럼 원산폭격이야!


어쨌든, 이런 질곡의 시간이 끝나고 나는 합격증을 받아 들고 빵집에 앉아 라떼 마끼야또를 홀짝이고있지 않은가! 이런 날이 오고야 마는구나! 푸하하하!


내가 나의 실력을 객관적으로 타진해볼 기회가 없었다는 것도 합격의 기쁨을 배가시켰다.  코로나로 인하여 온라인 수업을 듣다보니 제대로된 모의고사를 처음부터 끝까지 볼 수 있는 기회가 전혀 없었다. 숙제를 성실히 하느라 90분이내 써내야할 과제를 3시간 이상 써서내고, 그중에서 신문기사를 짜집기해서 제출해 gut을 받은 적도 있었고. 어쨌든 그런 이유로  내 점수를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중 의외의 결과를 받아 좀 얼떨떨한 것은 사실이다.


결과를 받아들고 느낀 점은 의외로 시험이 어렵지 않았다는 것, 쓰기시험 당일날 벼락치기를 한 것이 성공적이었다는 점, 그리고 말하기에서는 파트너를 잘 만나야 한다는 점이다. 쓰기시험은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C1 쓰기 교본을 잘 읽고 구성과 분량을 거의 비슷하게 쓰는 트레이닝을 반복하면 분명 좋은 점수를 얻을 수 있다. 특히 문장을 전환할 때 쓰는 숙어는 달달 외워서 똑같이 적용하면 좋다. 말하기는 사전에 파트너가 정해진다면 둘이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여러번 토론하는 연습을 하고 상호보완을 해주면 좋은 결과를 받을 수 있다.


읽고 이해하기는 정말 난해하다. 하루 이틀 공부해서 될 일이 아니다. 어휘력도 풍부해야 하고 빨리 읽고 이해하는 훈련을 해야하는데 이게 한두 달 해서는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빠르게 읽기 훈련이 안된데다가 독일문장을 한국문장처럼 속독으로 읽는 버릇이 생겨 여러번 읽어도 이해를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쉬운 문장이면 모를까 어려운 문장을 또박또박 읽지 않고 눈으로 훑어 넘기다 보면 두세번 읽어도 이해하지 못하고 시간만 축내는 불상사가 생긴다. 게다가 문장을 읽고 이해했더라도 교묘하게 비튼 문제에 정답을 찍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문제는 고등교육을 받은 독일인들도 많이 틀린다. 좋은 점수를 받으려면 모의고사를 많이 쳐보고 문제유형을 익히는 수밖에 없다. 


나는 때때로 C1 읽고 이해하기 문제를 풀면서 내가 쓸데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때도 있었다. 읽고 이해하는 것 까지는 좋은데 글을 읽으면서 피곤하게시리 글쓴이의 마음까지 알아채야하나? 싶어 짜증이 났다. 내가 종종 모의고사에서 접했던 문제유형을 밝히자면 아래와 같다.


위의 문장에서 느낄 수 있는 글쓴이의 마음은?

1. 슬프지만 한편으로는 통쾌하다.

2. 마냥 기쁘지만은 않다.

3.동정심을 유발한다.

4.스스로 독립하고자하는 결의가 느껴진다.


이따위 문제가 나오면 나는 문장을 한 번 더 읽으며 글쓴이가 동정심을 유발한 구석이 있는지(글 속의 동정이라는 낱말에 속으면 안됨!), 독립심이 느껴지는지, 통쾌한 기분이 드는지 알뜰히 읽어 보려는 노력을 접는다. 2점을 더 받고자 내 정신을 혹사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저런 문제는 그냥 찍는다. 불행히도 C1 시험에는 독일 살면서 시험외에는 절대 써먹을 일이 없는 저런 종류의 문제들이 넘쳐난다.


에잇! 하나하나 시험 당일날의 기억을 들춰 내다보니 슬슬 불쾌해진다. 다시는 안보고 싶은 시험이다! 전 8시30분부터 오후 3시까지. 인생이 달린 수능도 아닌데 하루종일 앉아서 시험을 보았다. 그래서 C1 시험 합격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이제 두번 다시 C1 시험을 볼일이 없어 얼마나 다행인지!


이 와중에 나의 토론 파트너이자 아직도 연락을 하고 지내는 우리반의 에이스 Pinar는 C2(독일어 최고 난이도 시험으로 가르치는 학원도 찾기 어렵다는 말이 있음) 시험을 볼까 생각중이란다. 나는 별말 안했다. 니 좋을 대로 하고 살아. 대신 시험이 어렵다고 나한테 불평하지만은 말아줘. 상상도 하기 싫으니까 말이야.


PS.과거운에 대하여

내가 자주 썼다. 나는 과거운이 좋다고. 그건 사실이다. 시험을 치면 잘 붙는 편이다. 면접을 봐도 잘 붙는 편이다. 사람들은 그런 내게 좋겠다고 한다. 얼핏 보면 좋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실력은 별로인데 운이 좋아서 좋은 직장에 입사하게 되었다고 치자. 거기에서 나는 다른 황새들을 따라가려고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을 것인가. 실력도 없는데 좋은 학교에 붙었다고 치자. 나는 힘든 공부 등쌀에 학교다니는 내내 좋은 운을 저주할 것이다.


내가 다녔던 직장들을 보면 다 하나같이 내가 감당하기에 버거워 초창기에는 특히 죽을 고생을 하며 버텼던 곳이었다. 그 덕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온 것은 사실이지만 이젠 그렇게 살고싶잖다. 젊어서 고생은 나를 성장시키지만 나이들어 고생은 내 남은 에너지를 소진시킨다. 조용히 가볍게 살고싶다.



매거진의 이전글 Telc 독일어 C1 시험을 보던 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