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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방 김안녕 Nov 30. 2022

노래로 사람을 기억한다 - J에게

'검정치마 - 피와 갈증'을 들으며 


 J에게.



 J, 잘 지내고 있을까요?


 인사치레로라도 제게 되물으신다면, 차마 잘 지낸다고는 말하지 못할 정 싶습니다.


 J와 연락이 끊긴 지 고작 3년이 채 되지 않았지만, 그 짧은 시간 내에 제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외모는 다를 것이 없습니다. 정돈되지 않은 긴 머리에, 여전히 깡마른 팔뚝, 배만 툭 나온 운동 안 하는 현대인의 표상과도 같답니다. 


 다만 사람을 대하는 게 어려워졌어요. 아마도 '그때 그 일' 이후 심경적 변화가 제게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으레 짐작이나 하고 있답니다. J는 어떨지 궁금하네요.



J, 우리의 첫 만남을 기억합니다.


 낙엽의 갈색 냄새가 흠씬 두드러지던 초가을, 문득 진한 가을 청취를 마음껏 느끼고 싶어 무작정 떠난 강원도행 기차 안이였지요. 그 기차 안에서 나는 창가 자리에, J는 바로 내 옆자리에 앉았고요.


 평소 같았으면 가득 찼었을 기차였을 터인데, 그날따라 그 기차 칸 안에는 우리 둘밖에 없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리 빈자리가 많은데 내 옆에 앉은 J, 당신을 약간은 당황스러운 채로 내색 내지 않고 흘깃 지켜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낑깡같이 작은 얼굴 -당신의 손에 낑깡 한 봉지가 들려 있었기에 이렇게 비유하고 싶네요-, 실루엣 커튼마냥 찰랑거리는 긴 생머리, 그날 햇살보다 찬란한 피부. 그런 외모에서 뿜어져 나오는 남다른 분위기까지. 


 이런 사람에게는 혼자 서울에서 강원도 그 어딘가로 가는 데에 어떤 사연이 있는지 궁금해지더군요. 그런데 J, 알잖아요. 저한테는 처음 본 아리따운 여성에게 말을 걸 만큼의 용기가 없는 것을요. 그냥 조용히 지나갈 생각으로 잔잔한 'coldplay' 노래 따위를 들으며 창밖에 집중했던 -하지만 신경 반쯤은 오른쪽에 쏠려있던- 기억이 사뭇 나네요.



 J, 그런 제 어깨를 톡톡 치더니 당신이 한 말을 기억합니다.


"낑깡좀 드실래요?"


 지금 생각해보면 참으로 웃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귤도 아니고 낑깡이라니요. J, 당신이 그 이후로 낑깡을 먹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습니다만, 그때는 무슨 사연이 있어 낑깡을 한 봉지 가득 챙기었을까요. 


 그렇게 내 이어폰 한 꺼풀을 벗겨낸 당신은 심심했는지 이런저런 말들을 쏟아냈더랬지요. 솔직히, 그때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 기억이 나지는 않습니다. 그저 깜깜하고 기다란 터널 몇 개나 지나쳐야 할 만큼의 긴 시간을 때울 수 있을 만큼의 작고 얇은 말들이었겠지요.


 내리는 역이 서로 다른 터라 헤어짐의 순간은 다가왔고, 서로 번호 교환을 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지요.


 J, 지금의 나는 누군가와 다음 만남을 기약한 이후 정말로 만날 만큼 심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랍니다. 아마도 당신과의 만남을 실현하기 위해 내 모든 여유를 다 쏟아부은 탓이 아닐까 우스갯생각이나 해보렵니다.



J, 우리의 만남들을 기억합니다.


 J를 다시 만난 곳은 위례의 한 선술집이었지요. 술을 좋아한다던 당신, 하지만 사케를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다는 J에게 찬 바람 솔솔 불어올 때의 목구멍부터 저 깊은 곳 어딘가까지 따뜻하게 데워주는 데핀 도쿠리 사케를 소개해주고 싶어.


 J, 저는 그때 마셨던 2만 9천 원짜리 싸구려 사케를 제가 마신 사케 중 가장 맛있었던 사케라고 자부할 수 있습니다. 알고 싶었던 J의 모습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마시는 한잔 한잔이 어찌 그리 달콤하던지요.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니겠지요. 그날의 멋진 담소 자리는 작고 쉰내 나는 내 골방까지 이어졌으니요. 


 그 이후로도 우리는 참 많은 것들을 같이 만들어 나갔어요.



 J, 재작년 여름 비 보솔 보솔 내리던 그때를 기억하실는지요? 대치에서 괜스레 빗소리 핑계 내어 만나 기갈나게 구운 전 한상과 막걸리를 먹었던 그때 말입니다. 그리고 사뭇 아쉬워 편의점에서 맥주와 요깃거리들을 한가득 싸들고 갔던 물길 갈대 속 벤치 그곳을 말입니다. 


 일부러 열심히 밤늦게까지 운동으로 활발한 삶을 이어나가는 사람들의 눈에 띄기 싫어 갈대길 안의 조용한 벤치에 자리를 잡았더랬지요. 비 오는 하늘 가릴 곳이 없어 중간에 우산 하나 두고 말입니다. 그리고 J는 앉자마자 핸드폰을 이래저래 만지작 대더니, 대단히 서정적이고 잔잔한 노래 하나를 틀었지요. 처음 듣는 노래에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이거 무슨 노래예요?"


 "아, 이거 검정치마 노래예요. 가사 진짜 좋으니까 꼭 집중해서 들어봐요."


 J, 실은 저는 심하게 감성을 자극하는 잔잔한 노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일전에 'cigarette after sex' 등의 비슷한 노래 풍을 아무개가 추천해주어 들었던 적이 있습니다만, 그마저도 제 귀에 잘 맞지 않아 금방 질려버렸던 기억이 나네요. 


 그런데 그날만큼은, 괜스레 그 서정적인 노래를 더 듣고 싶더군요. 조그마한 물방울들이 톡톡대며 만드는 촉촉한 물 내음. 잔잔한 바람 따라 흘러가는 내 생각들. 당신의 입에서부터 생겨나는 회색 연기의 일렁일렁. 그리고 J, J, J. 그 노래의 마디마디 누구보다 잘 어울렸던 J. 무어 말이 필요할까요. 


 J, 우리는 그 이후로 자리에서 일어나기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았죠. 그저 그 순간에 모든 감각을 열어두고 소중히 받아들일 뿐이었습니다. 점점 밤이 늦어져 집에 들어갈 때가 될 때쯤에나 정신을 차려 

 '집에 가면 담배 냄새 때문에 부모님께 혼나겠다'라는 당신의 그 여리디 여린 목덜미에 데오도란트를 발라주는 -그렇다고 담배냄새가 지워지지는 않겠지만서도- 순간까지도, 저는 그 모든 순간들을 제 별주머니에 담아두고 있답니다.



 그 이후로 우리가 무엇을 하던 검정치마 노래는 빠지질 못했지요. 내 거대한 바이크에 둘이 나란히 앉아 헬멧에 있는 블루투스 스피커로 같은 노래를 들으며 라이딩을 할 때도, 한강 둑을 조그맣게 걸으며 쫑알쫑알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면서도, 밤늦게 남들 몰래 불 다 꺼진 제 사무실에 들어와 조명으로 수 놓인 서울역 야경을 구경하며 청하 한잔을 곁들일 때도.



 J, 나는 당신을 '검정치마'의 노래들로 기억합니다.


 딱히 J에게 무슨 할 말이 있어 편지를 쓰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를 써야만 했어요. 왜냐하면 어제 문득 '검정치마'의 노래를 듣게 되었거든요. 


 아까 전에 말했듯이, 지금의 저는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을 할 만큼 심적 여유가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J같이 아리따운 여성에게 먼저 말을 걸 용기가 있는 사람도 아니고요. '그때 그 일' 이 있은 이래로 바보 천지마냥 J에게 연락 한번 해보지 못했지만, 간혹 J가 내 머릿속을 스쳐지나가 주는 순간에는 '검정치마'의 노래들을 들으며 그때를, 그때의 J를, J를 한 움큼 꺼내어 보곤 한답니다.


 그때의 기억을 함께 만들어 준 것이 고마워 이렇게 한 자 적어봅니다. '검정치마'의 '피와 갈증'을 들으면서요.


 여러모로 고마웠습니다.


 지금은 행복해졌기를 바라며, 


J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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