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경험-몰입
문제인식
현실에 대한 불만으로 온라인활동을 독서, 글쓰기, 영어, 요리까지 점점 늘려가며 어느 순간 알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대면보다 온라인에 빠져 정작 현실은 소홀히 하고 있고 괴리감이 들어서다. 회사에서 대화 중간의 공백, 업무 중의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수시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나를 발견한다.
최근 읽었던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처럼 주위에 속내를 털어놓을 사람, 찾아갈 사람이 딱히 생각나지 않는 지금의 상태로 계속 살아도 괜찮은지 의문이 들었다.
저는 남들이 저를 좋아해 준다는 건 알지만 남을 사랑하는 능력에는 결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제게 '친한 친구'라는 게 생길 리도 없는 데다, '방문'의 능력조차 없었습니다(인간실격, p. 98).
나는 매일의 일상을 함께하는 동반자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분명혼자 있는 시간으로 충전이 되는 확신의 I형이지만, 가끔은 결이 맞는 사람과 만나 유대를 쌓아가고 싶다.
문제원인
내가 지금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알고 싶어 크리스틴 로젠의 <경험의 멸종>을 읽었다. 책을 통해서 그동안 내가 느꼈던 불안은 매개된 가상연결이 일상으로 확장됨에 따른 '진정성'에 대한 불안이었고, 현실에 대한 ‘기대’가 없어서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예전에 봤던 영화 <레디플레이어원>의 한 장면이 생각났다.
즉, 내가 하고 있는 일련의 활동들이 그저 대체경험으로, 현실 안주에 그치게 되면 의미 없고, 내가 바라는 현실로 연결될 수 있다고 '기대'할 수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었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주위의 세상과 어울리는 대신 자신만의 현실을 만들어가고 있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파악하려면, 시간, 인내, 지루함, 백일몽, 발견에 대한 '기대'가 필요하다(경험의 멸종, 150-158).
문제해결
그렇다면 내가 바라는 현실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대답은 장 그르니에의 <섬>을 읽으며 찾을 수 있었다.
인간이 탄생에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통과해 가야 하는 저 엄청난 고독들 속에는 어떤 각별히 중요한 장소들과 순간들이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이 엉뚱한 인식이야 말로 모든 인식 중에서도 가장 참된 것이다. 즉 내가 나 자신임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섬, 93)
나에게 각별한 장소들과 순간들에서 떠오른 나의 엉뚱한 인식이 진정한 나 자신이고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라면, 바로 그것이 나의 소명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그 모습을 기대하며 현실에서 구체화해 나가면, 인간실격의 주인공 요조가 다행으로 여기는 것처럼 그저 지나가서 다행인 인생일지라도 또 하나의 예기치 않은 순간을 기다리며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제가 지금까지 아비규환으로 살아온 인간세상에서 딱 하나 진리 같다고 느낀 것은 그것뿐이었습니다.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갑니다(인간실격, p. 156).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새로운 예기치 않은 순간을 기다리면서 그저 살아남아 있는 것뿐이다(섬, p. 102).
삶의 의미는 첫 숨을 쉬는 순간부터 마지막 숨을 내쉬는 순간까지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자신의 소명을 발견할 때 의미와 행복도 발견할 수 있다(나로 늙어간다는 것, p. 196).
결국 대체경험으로 만족하며 자기만의 현실에 머물러 있지 않으려면, 매개된 가상연결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대면 상호작용, 제3의 장소와 공적공간에서의 집중 같은 "직접경험"이 반드시 필요하며, 이를 통해 뜻밖의 행운, 직관, 공동체, 자발성, 공감 같은 것들이 흘러나올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경험의 멸종, p. 28).
또한 일을 하는 다른 방식이 떠오르는 것은 한걸음 물러섰을 때(또는 오락거리 없이 기다려야만 하는 때)뿐이므로, 경험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는 디지털기기 등의 자극에 주의하며 몰입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엄격한 일상을 유지할 필요가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경험의 멸종, 134).
결론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이 현실로 연결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는 경험에 집중하고, 그에 수반되는 기다림과 지루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디지털 사회의 양면성을 염두에 두고 디지털 기술을 분별 있게 활용하며, 제3의 장소와 공적공간에서 뜻밖의 경험을 놓치지 않도록 삶의 균형을 맞춰나가야 하겠다.
그래서 모쪼록 나의 40대는 중요한 문제를 의논할 수 있는 커뮤니티에 정착하기 위해 이방인의 자세로 온오프라인을 막론하고 부지런히 찾아 나서며 다양한 경험을 시도해 보는 시기가 되었으면 한다.
<참고자료>
책
경험의 멸종(크리스틴 로젠, 2025, 어크로스)
나로 늙어간다는 것(엘케 하이덴라이히, 2025, 북라이프)
섬(장 그르니에, 2020, 민음사)
인간실격(다자이 오사무, 미르북컴퍼니)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