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다 보니 뛰고 싶어 졌어요
걸으러 집 밖을 나오는 순간 나의 일상은 특별해진다.
계획 없이 무작정 가방하나 둘러메고 집을 나와 그날 날씨에 따라 기분에 맞춰 가고 싶은 곳을 정한다.
‘아~ 오늘 날씨 너무 좋은데,,,, 비치 가볼까’
일단 페리를 타러 시티로 향한다. 메트로 타러 가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커피를 테이크아웃하고 커피 한 모금하면 아침에 아이들 등교 준비하며 쌓였던 피로가 싹 풀린다. 그렇게 페리를 타러 써큘러키역에 도착하면 시드니의 상징 하버브릿지와 오페라하우스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아 맞다, 나 시드니에 살고 있었지~ 이렇게 아름다운 나라에 내가 있다니. 남편아 고마워’
새삼스레 한국에서 열일하고 있을 신랑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아주 잠깐이지만.
내가 사랑하는 비치, 맨리비치에 가기 위해 서둘러 페리 탑승구로 향했다. 페리 탑승을 위해 별도로 표를 구매할 필요 없이 대중교통카드를 ‘탭’하기만 하면 된다. 페리에 탑승하면 빠른 걸음으로 2층으로 올라가 야외 자리를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를 한눈에 바라보는 훌륭한 뷰를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드니에 오래 머문 몇몇 사람들은 이 뷰를 봐도 이제 감흥이 없다고들 하는데, 나는 그렇지가 않다. 보면 볼수록 좋고, 보고 있어도 또 보고 싶고, 매일 봐도 질리지 않을 뷰 포인트다.
따뜻한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시드니 항구를 가로지르는데 그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마치 섬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든다.
드디어 코스탈워크.
시드니에는 제법 알려진 코스탈워크 코스가 몇 군데 있다. 그중 한 곳이 맨리비치에서 쉘리비치를 잇는 코스인데 여기가 아주 볼만한다. 근처에서는 꽤나 큰 비치에 속하기 때문에 맛집과 상점 등 걸음을 멈추고 잠시 들러보고픈 곳들이 늘어서있고, 바다의 파도도 결코 순하지 않다. 서퍼들은 이런 해변을 귀신같이 찾아내서 자기보다 큰 보드를 이고 지고 모여든다. 그런 그들을 구경하는 재미 또한 놓치지 어려운 장면이다.
어디 그뿐일까. 쨍한 태양과 맞서기라도 하는 듯 비키니 차림으로 드러누운 썬텐족도 바글거린다. 선크림을 꼼꼼히 챙겨 바르지 않으면 피부암에 걸린다는 무서운 말을 성경말씀처럼 신봉하는 나 같은 동양인은 선글라스, 양산, 모자를 동원해 해를 피하기 바쁜 것과 무지 대조적이다. 그런 그들이 마냥 신기한 나는 영화를 감상하듯 일삼아 그들을 보느라 하루가 짧다.
유명한 걷기 코스인 만큼 사람들이 많다. 유모차를 끌고 걷는 사람, 귀에 이어폰을 끼고 혼자 걷는 사람, 친구 또는 연인과 대화하며 걷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모습으로 즐기고 있다.
난 언제부터인가 걸을 때 이어폰을 귀에 꽂지 않게 되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귀찮아서 또는 가지고 나오지 않아서 안 하게 된 것 같은데, 그게 습관이 되어서 지금은 하지 않는 게 편해진 것 같다. 그러면서 세상의 소리가 내 귀에 들리기 시작했다. 바람소리, 파도소리, 새소리, 사람들 말소리, 발걸음 소리, 뛰는 소리, 숨 헐떡이는 소리. 걸으면서 자연스레 들려오는 소리를 듣고 있으면 힐링이 된다. 내가 굳이 무얼 하지 않아도 주변 소리를 통해 살아있음과 세상에 속해 있는 느낌을 받는다.
그 어느 때보다 혼자 걷고 있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복잡했던 생각들이 비워지는 느낌이 든다. 오롯이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간. 나의 발소리, 숨소리, 발과 팔의 움직임,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까지도 느낄 수가 있다. 진짜 ‘나’와 대면할 수 있는 걷는 행위가 참 좋다. 다들 나만의 시간을 가지는 방법이 있기를.
천성이 게으른 나는 ‘게으르지 않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하며 지낸다.
특히, 한국에서와 달리 일을 하지 않고 있는 지금은 하루를 나 스스로 정신 차리고 계획하지 않으면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것 같아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그래서 요새 유행하는 이른바 ‘갓생 살기’에 나도 동참 아닌 동참을 하고 있었다. 루틴 만들기에 집착하고, 뭐든 도전해 보려고 노력하는 삶. 나의 ‘본성’을 거스르는 삶을 살기 위해 애쓴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루틴을 만들수록, 계획을 세워서 이루려고 할수록 더 불안해지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루틴도 계획도 이루지 못하면 자책하게 되고, 또 이루었다 해도 얼른 그다음 목표를 설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결국 지치고 만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생각 없이 내가 할 수 있는 걸 꾸준하게 하는 게 ‘나의 생’을 사는 게 아닐까. 무엇이든지 꾸준하게 하는 게 가장 힘든 일이니까 말이다.
‘갓생 살기’의 일환으로 시작한 걷기였지만, 지금은 그냥 나와서 걷는다.
‘그냥 한다는 것은 힘들고 귀찮다고 해서 피하는 게 아니라 지속해 낸다는 뜻 아닐까.
스스로를 믿고 그냥 하다 보면 이전의 나보다 분명 성장할 것이다.’
오늘도 역시 러닝 하는 사람들이 많다.
호주 사람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날씨 상관없이, 아침 점심 저녁 시간 상관없이 참 많은 사람들이 뛰고 있다. 걷고 있는 내 옆을 스쳐가는 러너들의 숨소리를 들으면 어느새 나도 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러너들 사이 나도 소심하게 뛰어보지만 뒤에 매달고 온 가방이 꽤나 거추장스럽다. 그러고 보니 러너들은 아무것도 없이 가벼운 차림새로 뛰고 있었다. 물병 하나 들지 않고 말이다.
난 그 모습을 바라보며 ‘저 사람들 목도 안마르나’라는 1차원적인 생각을 하고는 웃음이 피식 나왔다.
시드니 곳곳엔 음수대가 참 많이 설치되어 있는데, 다들 그걸 이용하나 보다. 수돗물 맛이 강해서 마시기 좀 힘들지만 목이 마르면 먹을 수밖에.
일단, 뛰려면 둘러메고 나오는 배낭부터 벗어던져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방 안엔 마실 물과 출출할 때 먹을 블루베리 한통, 초콜릿이 전부였는데 왜 이리도 무거운지. 지금까지 나의 걷기는 주객이 전도된 걷기였을까. 아니, 어쩌면 외출 할 땐 간식거리를 챙겨야 한다는 엄마스러운 무의식에서 나오는 행동일지도.
그리고 두 번째로, 평소 헬스장에서 러닝머신 할 때 걷기만 할 게 아니라 10분이라도 뛰는 연습을 해야겠다. 지금까지 내가 했던 러닝머신은 ‘유산소 운동을 했다’라는 위안을 얻으려고 보고 싶은 유튜브 틀어놓고 설렁설렁 걷기만 했던 기계 아닌가. 이제는 러닝머신을 제대로 ‘러닝’해야겠다.
걷기에서 시작된 나의 달리기에 대한 열정이 새롭고 기대된다.
나이가 들수록 무언가에 가슴 뛰는 일이 어려운 것임을 알기에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감사하고 행복하다. 지금은 그냥 나와서 걷지만, 언젠가 그냥 나와서 ‘달리는’ 나를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