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의 수박은 새까만 씨앗이 송알송알 많이도 박혀있었다. 주로 분홍색이거나 때로 파란색의 그물망에 이놈이 하나 걸려든 날이면 어스름한 달빛아래 올망졸망 이야기가 이어진다. 삐거덕거리는 툇마루는 더없이 근사한 테라스다. 마당 나뭇가지에 샛노란 백열등 하나 대롱대롱 매달리면 빨간 수박 속은 수줍어 얼굴을 붉혔다. 희한하게 비싼 수입 그릇은 애당초 무용지물이다. 수박은 자기 몸으로 자기 몸을 안고 또 버텨 내었다. 주인집 아줌마가 무섭게 생긴 부엌칼로 탁. 병사의 철모처럼 반 토막 난 수박은 이제 아이들의 행복한 전쟁터이다. 무딘 스테인리스 숟가락으로 푸욱. 푹. 쓱싹. 쓱싹. 낮에 사다 놓은 메주 같은 얼음덩어리 뾰족하니 부숴 얹으면. 그저께 방앗간서 빻아놓은 미숫가루 솔솔 뿌려대면. 그곳은 이웃사촌의 낙원이다. 하루를 지낸 땀과 하루를 버틴 눈물이 1980년대의 한여름 밤을 달래주었다. 그때 그 수박은 왠지 무척 빨갛다고 생각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