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찰일기) 말놀이

어느 가을날의 이야기

창녕 남지 개비리길을 걷는다. 봄에는 유채, 가을엔 억새가 멋진 곳이다. 늦가을이라 억새마저 거의 다 쓰러지고 핑크뮬리 더미는 핑크빛을 잃은 뼈만 앙상하다. 낙동강을 따라 둘레길이 같이 흐르고 있다.


개비리길이라는 이름이 궁금하다. 걷다 보니 친절한 안내가 있다. ‘개’는 ‘강’을 의미한다. ‘비리’는 ‘벼랑’이란다. ‘낙동강을 따라 이어진 절벽을 따라 걷는 길’이라 ‘개비리길’이라고 한단다.


‘가짜, 거짓’의 뜻으로 쓰인 접두어 ‘개-’가 아니다. ‘비리’는 처음 듣는 말인데 ‘벼랑’보다 좀 덜 가파르고 온화하고 포근한 느낌이다.


‘갯버들’은 ‘강가의 버들’인지, ‘가짜 버들’인지 갑자기 헷갈린다. 궁금하지만 찾지 않기로 한다.


낱말의 소리가 주는 느낌을 분석해 보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실제의 의미와 무관하게 소리만으로 전해오는 직관적인 인상을 파헤쳐 보는 것을 좋아한다.


여행을 가면 고속도로나 국도 옆으로 휙휙 지나치는 지명을 보는 게 재미있다.


이곳 ‘남지’는 왠지 한참 동안 이어지는 긴 여운이 느껴진다. ‘거창’은 왠지 늠름하고 비장하다. ‘고령’은 왠지 따사롭고 아기자기하다. ‘괴산’은 왠지 차갑고 날이 선 느낌이다. ‘산청’은 왠지 맑고 곧은 느낌이다. ‘청송’은 왠지 길 지나는 나그네 같다.


쓸데없는 짓이다. ‘왠지’를 붙여 이렇게 주관적인 느낌을 덧씌우는 일이란! 이보다 비논리적이고 무의미한 놀이가 있을까?


그런데 이런 말장난을 하는 게 나의 소일거리라고 한 대도 그게 뭐 어때서? 다른 사람들은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하겠지만, 나는 ‘그게 뭐 어때서?’라고 말할 거다.


다른 사람들이 ‘그게 뭐 어때서?’라고 말하면, 이번에는 ‘그래서 참 재미있군요!’라고 말할 거다.


말은 참 다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은 것 하나하나에 다 그만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하지 않은, 점 같은 많은 '작은 존재들'이 오늘도 자기 자리에서 꿋꿋이 웃고 있다. 웃으려고 한다.


의도가 삶이 되기를 바라며 웃어도 된다. 말도 안 되는 자잘한 헛소리가 갖는 힘을 믿는다.


논리의 힘을 뺀, 그저 그냥 하는 말은 악수의 유래와 비슷한 것 같아서 편안하다. ‘내 손에는 총이 없어요.’라고 웃는 것 같아서 무장해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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