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25]
우리는 슬퍼서도 울지만 기뻐서도 웁니다. 가요무대를 보다가, 드라마를
보다가, 아침마당을 보다가, 깔깔대며 웃기도 하지만 화장지를 뽑아
눈물을 찍어내며 훌쩍이기도 하죠.
거기엔 내 기억과 교호 하며 통하는 게 있어서입니다. 내가 걸어온
파란 많은 인생길의 굽이굽이가 TV 속의 사연과 맞닿을 때, 아름다운
추억과 가슴 아픈 기억이 살아나 동화되기 때문이죠.
조물주가 인간에게 주신 선물 중에 큰 것이 기억하는 능력입니다. 만일
사람에게 기억 회로가 사라져 삶의 희로애락을 순간순간 재생할 수 없다면,
이처럼 슬픈 일이 없겠지요. 기억이 있고 추억이 있어 삶이 풍성해집니다.
사람들은 늙어가면서 기억력 감퇴를 가장 아프게 생각하지요. 노인에게
더 이상 기억을 더듬을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그처럼 끔찍한 일도 없을
것입니다. 온종일 풀포기 하나 없는 사막을 걷는 것과 다를 바 없겠죠.
꿈을 키우며 사는 젊은이와 달리 노인은 추억을 먹고사니까.
기억 속에 자리 잡은 아득하고 아련한 것들. 나만의 추억, 나 하나의 사랑,
나 하나의 꿈, 나 하나의 기쁨과 역사가 있습니다. 요즘 출산 후 일어나는
기억력 감퇴로 속상해하는 여성이
많다고 해요.
이러한 변화는 기억을 조절하는 뇌 영역이 모성의 뇌로 바뀌는 과정에서
생긴다고 합니다. 덜 중요한 정보는 걸러내 버리고, 아이의 요구에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고자 뇌 구조가 일시 변화하는 현상이랍니다.
역사학자 E.H. Carr은 위대한 역사는 필연의 산물이라고 했어요.
모든 산업혁명에 필연으로 자리한 것이 첨단기술의 구축에 기반하지만,
그 바탕에는 기술의 본질인 ‘재생기술’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재생기술은 인류문명의 꽃입니다. 다시 보고, 듣고, 느끼고 싶은 모든
감정 영역엔 기억을 재생하고 싶은 욕구가 깔려 있습니다. 그 욕구는
세월이 흐르면서 더 커질 수밖에요.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간절함이
전화의 발명을 가져온 것처럼.
사람이 태어나 처음 경험하는 사진 찍는 일부터 재생기술이 스며있어요.
과학이 발달하고 시대가 변화하면서 인류가 내놓는 신기술 신발명은
대부분 재생기술에 기반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전화기와 녹음기는 소리의 재생이고,
TV와 비디오는 영상의 재생이고,
컴퓨터 디지털은 데이터의 재생이죠.
첨단기술이 이렇게 재생기술을 핵심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만큼
오리지널 재생이 어렵기도 하지만, 사람의 욕구가 기억이란 영역에
얼마나 집착하는지 알려줍니다. 라면의 분말수프 하나에도 그 옛날 맛에
영양을 얹은 재생기술이 들어가야 하니까요.
첫사랑의 아련함을 못 잊어하고, 오드리 헵번의 청순함을 기억하고,
비틀스를 지금도 떠올리고, 부모님의 희생과 헌신, 단란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워지는 것은, 재생할 수 있는 아름답고 아련한 추억이 있어서입니다.
놀랍게도 작년 8월, 전기차 업체 테슬라의 창업자 일론 머스크가 새로운
사실을 공개했습니다. 기억도 재생이 가능한지 뇌에 컴퓨터 칩을 이식해
두 달간 생활한 돼지를 소개한 거죠.
칩을 이식한 돼지가 냄새를 맡으려고 코를 킁킁거릴 때마다 코에서 뇌로
전달되는 신호를 실시간으로 칩이 수집해 기록한 것입니다. 이는 사람이
‘생각 읽기’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놀라운 일입니다.
머잖아 컴퓨터에 기억을 저장하거나 이를 재생하고, 로봇에 자신의 기억을
다운로드할 수 있다는 얘기인데, 그러면 삶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더 이상 기억력 감퇴나 상실을 고민하지 않아도 될 그런 세상을 예측
가능하게 하니까요.
21세기에 각광받는 AI(인공지능)도 복사 재생기술의 결정판입니다.
인류가 환호하는 더 빠른 속도로 더 편리하게, 더 큰 즐거움에
몰입시켜 줍니다. 이러한 과학의 성취 역시 재생기술의
진화가 필수입니다.
최첨단의 재생기술에 힘입어 언젠가 사람들은 기억으로 놀고 추억에 웃는
상팔자를 누리게 될지 모릅니다. 그 같은 세상이 은근히 가슴을 부풀게
하지만, 한편으로 두렵기도 해요.
그러한 상팔자가 인간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키는 '마스터 키’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 때문입니다. 편리함이 행복의 모든 요소를
대체할 수 있을까? 기억마저 어딘가에 종속되는 듯한 불안감은
나 혼자만의 망상이었으면.
글 이관순 소설가/ks8120@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