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 쿤데라의 느림의 미학

이관순의 손편지[24]

by 이관순

5G시대에는 초고속, 초대용량 통신이 가능해져 영화 한 편 내려 받는데 걸리는 시간이 고작 0.8초라니, 그 속도감이 놀랍기만 합니다. 인간의 초능력이 과학이란 날개를 달고 끝 모를 하늘로 날아오르는 걸 보면, 신과 인간의 영역이 모호해 진다는 생각에 덜컥 불안해 지기도 합니다.


나이가 드니 세월이 빠름빠름 이상으로 지나가고, 세상까지 ‘빠릿빠릿(빠르게)’을 재촉하니 생각이나 발걸음은 더욱 느려터지게 느껴집니다. 그러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이 시대의 아이콘인 ‘빠름’과 ‘편리성’이 우리네 삶을 마냥 행복하게 해줄까?


인생을 살고나면 대단한 것들이 아니라 사소한 순간들이 그리워지는 법입니다. 사소한 순간은 일상의 미세한 진동에서 생기는데, 인생을 광속으로 달리기 하다가 세밀한 즐거움을 다 놓치는 것은 아닌지.... 좀은 천천히 돌아보고 좀은 불편하게 살더라도 놓치고 싶지 않은 것과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만들고 사는 게 보다 생을 관조하며 사는 삶이 아닐까?


고즈넉한 저녁, 파리 근교의 고성을 향해 아내와 함께 한적한 길을 차를 몰고 달립니다. 순간 뒤에서 빵빵~, 경적을 울리며 젊은 남녀가 차를 몰아 쏜살같이 추월해 달려갑니다. 그걸 보며 화자(話者)는 생각해요. 저 연인들은 이 아름다운 저녁을 감상하며 사랑의 밀어를 나눌 생각은 않고 어째 저렇게 달리는 충동에만 사로잡혀 있는가. 밀란 쿤테라의 소설 <느림(La Lenteur)>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가인 쿤데라는 이 소설에서 오늘의 세상을 탄식합니다. “그는 아쉬워한다. 어찌하여 느림의 즐거움은 사라져 버렸는가. 아, 어디에 있는가 그 옛날의 그 한량들은.”그의 작품은 늘 비극적이면서도 희극적인 인간 존재의 모호함과 불확실성에 대해 깊은 성찰을 던져줍니다.


이 소설과는 IMF 늪에 빠진 한국호의 뱃머리에서 처음 만난 후, 세상이 온통 비명을 지르는 21세기 초입에서 두 번째 만남을 가졌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쿤데라가 던지는 화두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것은 왤까.작중 화자인 ‘나’(쿤데라일 것)가 아내 베라와 함께 호텔로 개조한 프랑스의 한 성에서 하룻밤을 묵으며 소설을 구상한다는 것이 내용의 전부인 이 작품에서 쿤데라는 희화의 날을 세웁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느리고 한가로운 관조와 여유가 사라져버린 오늘날의 현실을 특유의 가벼움과 철학적 유머로 느릿느릿 끌질을 쉬지 않아요. 그는 느림의 한가로움은 게으른 빈둥거림과 다르며, 그것은 마치 신의 창(窓) 들을 관조하는 행복이라고 동의를 요구하기도 합니다.


다시금 관조하게 되는 말... ‘느림이란 기억이고, 빠름이란 망각’입니다. 과거를 회상하고 미래를 구상할 때 발걸음은 느려지고, 모든 것을 잊고 싶어 할 때 발걸음은 빨라지는 법입니다. 우리의 발걸음은 슬프게도 계속 빨라지고 있습니다. 냄새나는 퇴적물을 쏟는 것도 마찬가지고요. 그러면서 모락모락 이는 자괴감은 툭하면 뛰자고 했던 우리의 자화상입니다. ‘빨리빨리’를 최고의 가치로 숭앙해온 우리...


다시금 쿤데라의 ‘느림의 철학’을 생각합니다. 속도를 멈추고 달려온 자리를 뒤돌아보며 무엇이 잘못됐는지, 고칠 것은 고치고 다시 나갈 길을 곰곰 따져볼 때가 아닌지. 바이러스 덫에 갇힌 지금이 바로 나와 우리를 고쳐야 할 때입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느림의 정도는 기억의 강도에 정비례하고, 빠름의 정도는 망각의 강도에 정비례한다” 는 말은 너남 없이 속도에만 몰입해온 세상에 대한 탄식과 비판을 담습니다.


작품 속의 춤꾼의 비유도, 오직 대중적인 인기에만 연연하는 광대 인생들에 대한 신랄한 비꼼이며, 욕망에 대한 인간들의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일깨웁니다. 희극과 비극이 뒤엉킨 인간의 운명을 특유의 유머가 밴 철학적 사유를 보여주는 쿤데라의 매력은 <느림>에 이어 국내에 소개된 소설 <정체성>에서도 예외 없이 나타납니다.


그는 외칩니다. “어느 날 그 여인이 변했다. 그렇다면 그 여자가 달라진 것인가 아니면 나의 시선이 변한 것인가?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느림>에 이어 <정체성>, <농담>에서 그가 던지는 또 하나의 번뜩이는 비수.... 그는 도대체 삶의 비밀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걸까.


순금으로 부서지는 햇살이 천지에 피를 돌리고, 아침마다 낯을 씻는 연한 풀잎들은 더욱 옷깃을 여미고, 나무들은 잎들을 키워 바람마다 노래를 잉태할 시간입니다. <느림>의 체온으로 이 봄의 순결을 찾아 떠나보세요. 열차가 발정 난 멧돼지처럼 삽시에 지나간 간이역에는 지금 무슨 꽃이 피고 있을까. (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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