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하나의 세상 '그래도'

이관순의 손편지[25]

by 이관순

누구처럼 말하고 누구처럼 사는 사람의 차이는 뭘까. 이태석 신부같이, 데레사 수녀처럼 우리 곁에 사셨던 분들이 그리움으로 숨 쉬는 오늘입니다. “간절히 원하면 이루어진다.”고 한 파울로 코엘료, 직관을 따랐을 뿐이라는 스티브 잡스, “공부가 가장 쉬웠다”고 말하는 수능 만점자까지. 그렇게 쉬운 일들이 왜 내가 손을 댔다하면 껀껀이 망하는 걸까.


바닷가 질척한 펄 아래 ‘그래도(島)’ 라는 섬이 섰습니다. 세상에서 상처 받고, 고통 받고 살다가 세상이 왜 이래? 이건 아니잖아! 숨이 찬 사람들이 모여들어 살아가는 곳 입니다. 더 이상 갈 곳이 없으니 숨길 것도 없다는 사람들이 어우렁더우렁 사는 섬입니다.


아름다운 섬 그래도. 섬마을 초입에 걸린 슬로건부터 철학적입니다. 셰익스피어를 전공했다는 분이 내걸었습니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Question.’ 그가 마을 사람들에게 해준 설명은 보다 심오합니다. “사람답게 죽을 텐가, 죽은 듯이 살 텐가, 삶이란 평생의 업이로다.”


오늘은 그래도가 열린지 100일. 주민전체회의가 열렸습니다. 그동안 통성명에 인사는 주고받았지만 인생 족보에 대해선 서로가 함구해 왔지요. 오늘은 상처는 상처대로 아픔은 아픔대로 살아온 인생을 털어놓고, 그래도 사람답게 살자고 만든 자리입니다.


턱수염이 짙은 운영회장이 일어나 “지금까지 돈 낳고 사람 낳다고 우겨댄 게 바로 나여” 하고 말머리를 엽니다. 당초 돈이란 사람을 위해 생긴 것인데, 돈에 집착하다가 돈의 노예가 돼버린 바보가 여기 서 있다며 돈 때문에 실패한 자신을 고백합니다.


섬에서 가장 예쁜 부녀회장도 상처가 커 보입니다. 옷이란 원래 몸을 보호하려고 생겨난 건데 어쩌다 명품만 치렁치렁 감고 살다가 옷을 보호하는 치사한 여자가 되었답니다. “아무리 옷이 명품이고 화려하면 뭘 해요 저녁엔 다 벗어야 하는 데.” 사치하다 탈난 여자의 변입니다.


이런 남자도 있습니다. 사람이 살려고 집을 지었는데, 집에 환장한 사람처럼 집에다 처바르고 비까번쩍 치장했더니, 뭐야! 내가 집을 지키는 개 신세가 됐다고 합니다. 인생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하다가 거꾸로 생각의 노예가 됐다는 생각장이 40대. 핸드폰 충전은 열심히 하면서 진짜 인생은 충전하지 못했다는 30대 고백이 이채롭습니다.


많은 걸 쟁여만 두었지 한 푼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갈 날만 기다리는 현대인이 나라는 60대 말기암 남자의 얘기는 주위를 숙연하게 합니다. 오지도 않은 노후대책에 매달리다가 오늘을 잃고, 구제받지 못할 희귀성 괴질에 걸렸다는 분의 스토리는 바로 내 일처럼 들려옵니다.


나누면 행복이 온다는 평범한 진리를 실천하지 못한, 스스로 장애인이라는 현대인도 있습니다. 사랑할 수 있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도 어영부영하다 아내를 저세상으로 보낸 자칭 바보천치도 있습니다. 인류가 파멸하는 길이라고 방방 뜨다가 슬그머니 돈 챙기고 폐수방류에 눈 감은 환경운동가. 모두 그래도 사람들의 자화상입니다.


아등바등 벌어 쌓아놨더니 자식들 재산 싸움 되고 결국 큰 아들 칼부림에 둘째가 죽었다는 노부부의 탄식도 쏟아집니다. 어깨를 들썩이며 우는 부부 앞에 다들 눈시울이 붉습니다. 버스 떠나면 끝장이 빤한데 어쩌자고 일만하다가 낙상으로 고관절을 깨먹었다며, 평생 꿈인 세계여행까지 일장춘몽이 됐다고 뒤돌아 앉는 여자도 있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의 공통점은 딱 둘입니다. 모두가 슬픈 사연을 안고, 세상을 거꾸로 보며 살았다는 점이죠. 머리를 숙여 다리가랑이 사이로 본 세상이 진짜로 생각하며 전도몽상(顚倒夢想)의 삶을 산 사람들. 사물을 바로보지 못하고 거꾸로 보거나, 헛된 꿈을 꾸면서도 현실로 착각하며 헤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 행복하고 아름다운 섬이 되고픈 그래도. 어떤 경우에도 목숨만은 끊지 말고 희망의 끈은 쥐자는 사람들의 삶의 터전입니다. GPS 에도 잡히지 않은 곳, 그래서 더 아련하고 외로운 섬, 그래도 꽃은 피고 봄은 깊어 갑니다. 오늘도 그래도 사람들은 “우리는 모두 사라진 일상을 찾아 나선 순례자” 라면서 헛헛한 웃음을 봄바람에 날리지요. (daum cafe/ leele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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