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50]
말에서 가장 고약한 것이 ‘말투’ 입니다. 사람에게 상처를 주니까요.
상처가 되는 말은 가장 친근해야할 부부간에 가장 많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일반 관계에서 생기는 상처는 쉽게 아물지만, 가까운
사람에겐 상처가 됩니다.
말에 잘못 베이면 반영구적 상처로 남아요. 말도 흉기처럼 해치니까.
어릴 적 동네 아이들은 어른들로부터 심한 언어폭력에 시달리며
자랐습니다. 저주스런 말은 총망라했지요.
“저 웬수! 귀신도 안 잡아가나.” 이 정도는 양반이죠. 염병할 놈,
벼락 맞을 놈, 우라질 놈, 썩을 놈... 열손가락을 꼽아도 모자랍니다.
불과 한 세대 전, 우리의 풍속도입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연민부터 앞섭니다. 얼마나 사는 게 힘들면 그 모진
말을 엄마가 자식에게 퍼부었을까? 6.25전쟁의 상흔 속에서 경제적
궁핍과 찌든 생활은 고통스럽기 짝이 없었을 테니까요.
집집마다 애도 생기는 대로 낳다보니 예닐곱은 보통이고 10남매도
흔했었지요. 그 많은 자식들 배곯지 않게 하고 입히고 대가족의 온갖
수발을 다 들어야 했으니 그 삶이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었을까요.
게다가 밖에서 쌓인 가장의 스트레스까지 받아내는 엄마였으니까요.
어쩌면 자식을 향한 모진 말투는 엄마의 화를 푸는 통로였는지도,
아니면 하나의 해방구였는지도 모릅니다.
일에 치어 머리는 터질 듯 한 데 이마저 없었으면 쌓이는 스트레스로
정신인들 온전했을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면 고달팠던 어머니의
삶에 가슴이 짠해집니다.
많이 좋아졌다지만, 지금도 자녀들에게 상처 주는 말투가 사라진 건
아닙니다. “그래 커서 뭐가 될래?” “한심하다. 널 믿고 내가 살아야
하니.” 여기저기서 말에 가시가 보입니다. 찔리면 상처가 되는 말의
가시들입니다.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앉아 있는데, 학생들이 시끌벅적 지나갑니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대화가 하나같이 욕설로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SNS상에 오르는 언어는 더 심각해요. 아예 상욕으로 도배를 하죠.
댓글 창에 달린 말은 인격이란 없는 쓰레기들로 난무합니다. 낯이
뜨거운 말은 방송에도 버젓이 나오죠. 예전에는 방송심의실이라는
곳에서 방송에 부적합한 말을 엄격히 걸렀는데 그러한 제방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어떤 때는 ‘리얼한 언어의 생얼’이라며 사회 분위기가 조장하는
느낌마저 듭니다. 시청률과 말의 유희를 좇아서 자극적으로 내뱉는
말의 도가 심각한 수준에 달했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사투리, 외래어의 범람은 물론, 술자리에서나 주고받을 만한 비속,
천박한 말들이 출연자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집니다. 여기에
자막까지 훈수를 들어 흥행을 돋웁니다.
연 전에 조선일보사설에 ‘말이 타락하면 나라가 타락한다’는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만큼 우리사회의 언어 타락이 심각해지고 있다는
진단입니다. 말은 어려서부터 부모가 가장 신경 써야 할 부분이죠.
‘세 살 버릇 여든 간다’는 것이 말버릇이니까요. 예부터 선비의
덕목으로 내려오는 것이 <신언서판(身言書判)>입니다. 몸 관리와
처신을 잘하고(身), 덕이 되는 말(言)을 앞세우고 있습니다.
어려서부터 덕스러운 언어의 습관을 들이라는 것입니다. 말이 곧
사람의 인격이니까요. 그러면서 공부(書)와 사리 판단(判)을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언어는 우리의 일상을 휘감고 있는 산의 숲과 같아요.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모여 숲을 이루지만, 한 나무의 병충해가 온 나무에 번져
숲을 망가뜨리기도 합니다.
겸손하고 선한 말, 배려하고 정제된 말이 향기 나는 언어의 숲을
만듭니다. 처세의 으뜸은 사람의 말에서 시작되죠. 좋은 언어 습관이
자연스럽게 몸에 밸 때, 웅변은 은(銀)이고 침묵은 금(金)이 됩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指紋)입니다. 생각과 정신, 영혼까지 담아내니까요.
말에는 정령(精靈)이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말이 씨가 된다’고 해요.
험한 세상을 사는 데는 위로와 격려, 보듬는 말이 최고의 사랑이자
선물입니다.
나도 오늘 누구에게 상처가 되는 말을 하지 않았는지, 내 말버릇은
어떠한지, 나의 말투를 한 번 돌아보면 어떨까요? 점수를 준다면
몇 점을 줄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