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쇠 집을 잃어버렸다

이관순의 손편지[253]

by 이관순

‘열쇠고리 집을 잃어버렸다’ 내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입니다. 어디에

두고 왔을까? 열쇠 집을 찾기 위해 내가 돌았던 동선을 살펴 따라가

보았지만 끝내 묘연한 건 열쇠의 행방입니다.


포기를 하자니 암담한 일이 한둘이 아닙니다. 당장 나타날 일들이

엄습합니다. 우선 자동차 시동을 걸 수 없고 집으로 돌아간 다해도

아파트 문을 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열쇠고리 집은 어느 해 스승의 날에 한 여학생에게 받은 선물입니다.

금색 고리가 여섯 개 달린 검은색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어요. 포장지를

뜯으니 “교수님, 지갑보다 더 소중하게 간직하셔야 해요.” 알쏭달쏭한

메모 글이 웃고 있었지요.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모른 채 책상 위에 열쇠들을 좌르르 쏟았습니다.

맙소사! 웬 열쇠가 이렇게 많지? 스스로 놀라고 말았습니다. 열쇠가

많다는 건 그만큼 가진 것, 숨길 것이 많다는 뜻이니까요.


눈에 보이는 열쇠가 이 정도라면 눈에 보이지 않은 마음속 열쇠는

얼마나 많은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열쇠를 하나씩 고리에 채웠는데

그러고도 남은 열쇠가 둘입니다.


문득, 툭하고 기억의 창을 두드린 것은 내가 처음 열쇠 하나를 가졌던

소년 시절이었습니다. 앉은뱅이책상 서랍 열쇠는 마법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지요. 은밀하게 쓴 일기를 지켜주는 금고 같은 것이었으니까요.


열쇠 하나가 가정과 학교에서 갖가지 규범에 눌렸던 정서를 자유롭게

풀어놓을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표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나는

열쇠 덕으로 온전히 나만의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에 행복했습니다.


물론 서랍 안에는 보이기 싫은 성적표나 시험지 따위도 숨겨져 있었죠.

가끔 어머니가 “그런다고 모를 줄 아냐?”라고 말씀하실 때는 찔끔해서

혹시? 의심을 하다가도 그럴수록 파수꾼처럼 서랍을 지켜주는 은빛

열쇠에 더 믿음을 주었습니다.


열쇠고리 집을 잃으면서 더 이상 내가 지닌 열쇠들은 은빛 금빛으로

빛나지 않았습니다. 바깥이든 내 안이든 ‘잠그지 않으면 도둑맞는다’는

강박관념이 조금씩 사라져 갔기 대문이죠.


열쇠집 분실은 그동안 무감각했던 열쇠의 의미와 나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학생이 내게 주고자 한 선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열쇠 개수만큼 겹겹의 문으로 닫혀 있는 내 마음도 만져보았습니다.

그것은 불신 덩어리로 차갑고 딱딱한 거북 등 같았어요. 이젠 정말

꼭 필요한 열쇠만 지니자고 열쇠 수를 줄여갔습니다.


그랬더니 열쇠가 4개로 절반이 줄었지요. 아파트 문, 자동차, 책상,

사무실 문···. 그러던 어느 날,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잃어버린

열쇠집이 주인을 찾아 돌아온 것입니다.


그로부터 까만 열쇠고리 집은 학생의 말처럼 지갑만큼 소중히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연을 이어온 열쇠고리 집이 지금은 서랍

깊은 곳에서 끝도 없는 안식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열쇠가 필요 없는 세상으로 변해서입니다. 열쇠 없이도 문이 열리는

스마트 시대를 살기 때문이지요. 저마다 크기와 모양이 다르고 정교함이

장인의 솜씨를 느끼게 하던 열쇠는 이제 구시대의 유물입니다.


모든 것이 시대와 함께 사라집니다. 사람인들 세월 따라 얼굴도 생각도

변합니다. 그 많던 좋은 기억들은 하늘에 총총히 박힌 별처럼 반짝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들었다는 자각이 들면서 자연스럽게 두 개의 질문에

집중하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이고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글을 쓰는 내 경우에는 더 많은 질문으로 번집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조건으로 자랐는데 어느 꽃은 일찍 피고 어느 꽃은

서리를 맞으며 뒤늦게 피는 걸까? 같은 생을 사는데 누구는 단명해서

안타깝고 또 누구는 눈총을 받으면서 지금도 사는 걸까?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씨앗과 열매처럼 씨앗은 열매의 원인이 되고

열매는 씨앗의 원인이 되는 관계 말입니다. 서로 독립된 개체로 사는

것 같지만 나 없이 네가 없고 너 없이 내가 없는 그런 관계···.


오늘도 그러한 관계 속에 하루가 열렸다 닫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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