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262]
“잘 들어라.”
아버지가 입을 여셨습니다. 그때 우리 가족은 저녁을 먹고 있었어요.
‘밥상 앞에선 입을 다물자’라는 가훈이 무색하게 아버지는 이날 입을
여셨습니다. 물론 밥 먹을 때는 입은 열지만 그것과는 달랐습니다.
“나... 회사 그만뒀다.”
아빠, 아버지, 여보... 밥상에 앉아 있던 가족들 모두, 순간의 감정과
표정으로 아버지를 불렀습니다. 아버진 짧게 말하고 식사를 계속
하셨지만 우린 숟가락을 든 채 서로를 바라보았어요.
“그런 얼굴 하지 마라. 나 안 죽는다. 나 다시 일어난다. 밥 먹자. 찌개
맛이 좋구나.” 아버지는 우릴 진정시키려고 말씀하셨지만 우리는 그 말이
모두 허언이란 것을 금방 알 수 있었죠….
2005년으로 기억해요. 그해 가을, 남산으로 오르는 길가에 있는 서울
예술센터에서 연극 무대로는 처음 <세일즈맨의 죽음>과 마주했지요.
그날 전무송의 명품 연기에 찡함을 받은 후, 지금도 배우는 전무송을
꼽습니다.
‘세일즈맨의 죽음’은 배우 전무송과 또 하나 아픈 기억을 남겨주었어요.
연극에 한참 몰입해 있는데, 옆자리에서 울음을 누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넥타이를 맨 남성이 가슴을 들썩이고 있었어요.
그는 연극을 다 못하고 중간에 나갔지만, 손수건을 얼굴에 대고 어깨를
들썩이던 모습은 무대 위를 떠돌았어요. 점차 내 눈가가 촉촉해집니다.
IMF 시절에 실직이란 어둔 터널을 경험한 터였으니까요.
‘세일즈맨의 죽음’이란 작품의 힘은 나와 우리가 겪는 아픔이 시공을
넘어 다시 만난다는 점입니다. 존재감만으로도 위안이 되고 바람벽이
되던 아버지가, 마음이 무너질 때 겪는 위기감은 어떠할까.
제목 그대로 평범한 세일즈맨의 이야기가 결코 평범하지 않음은 바로
우리가 겪는 현실 이야기니까요. 한 평생 몸 바쳐 헌신한 회사로부터
돌아온 것은 차가운 해고 통지서뿐입니다.
그 아버지는 가족에게 마지막 책임을 다하기 위해 차에 몸을 던지고 그
대가로 보험금을 남깁니다. 대공황을 겪은 미국 사회의 자화상이지만,
기본적인 인간의 존엄성마저 포기하는 황폐한 삶의 그늘입니다.
TV 뉴스를 보다 20년 된 기억을 떠올리게 한 것은, 보증금 빼서 직원
월급 주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치킨집 사장의 비보 때문입니다. 그냥
아픔이 아니었어요. 무엇이 저렇게 착한 사람을 사지로 몰았을까.
“너희들 입학식, 졸업식, 남자 친구 여자 친구 만나고 결혼하는 것...
보고 싶은 게 많은데 그걸 못 봐서 속상하다.”
노조의 괴롭힘으로 극단적 선택을 한 택배 대리점 소장의 유서에 남긴
글도 쉬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의 그 평범한 일상이자
소망을 강탈한 악마는 어디에 있는 걸까?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이제 더 이상 버틸 수가 없다.’
자영업자 단체 카톡방엔 단장의 아픔을 올리는 사연들이 줄을 이어요.
장기화된 우리 사회의 희생 강요에 극단적 선택을 한 자영업자가
22명이라는데… 숨겨진 죽음까지 합치면 그 수가 얼마나 늘까.
지금도 모진 명줄을 잡고 벼랑에서 떨고 있는 사람은 또 얼마나 될까?
평생을 신탁한 내 일터에서 코로나 사회가 보낸 해고 통지를 받아 드는,
사람들의 한숨은 또 얼마나 차오르고 있을지.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삶의 무게를 온몸으로 연기하던 전무송의 낡은
가방이 오버랩됩니다. 70년 된 시간의 간극, 미국과 한국이란 공간적
차이에도 이 작품은 지금 우리를 향해 되묻고 있습니다.
‘고통에도 뜻이 있다’? 그 뜻을 헤아려 받아들이면 고통 너머에 피는
명자꽃을 볼 수 있다고? 그것은 시인의 고뇌에 찬 희망일 뿐. 차라리
이렇게 외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인 위로일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 자영업자 중 벼랑에 내몰리지 않은 가장이 있을쏘냐!
지금 대한민국 소기업인 중 가족을 바라보며, 불안에 떨며, 위태로운
삶을 보내지 않는 가장이 있을쏘냐!
하늘에서 떨어지는 새똥도 막지 못하는 게 연약한 사람입니다.
지금 우린 가상이 상식이 되는 '웃고픈' 세상을 살아갑니다.
-소설가/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