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실수 안 하는 사람이 고수

이관순의 손편지[262]

by 이관순

나는 말이 많은 편일까? 적은 편일까? 말도 과하면 모자람만 못하다는 경구가 적용되는 쪽이다. 많은 인생 수험서가 공통으로 지적하는 게 말을 앞세우지 말고, 품위 있는 말을 하고, 말수를 줄이라는 것이다. 심리상담센터 소장인 지인 말을 빌면 사회에서 가장 환영받는 사람으로 남의 말을 잘 들어주는 사람을 꼽았다. 눈을 맞추고 상대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랬었구나.’ ‘상처됐겠다.’ ‘그래서?’ 말에 추임새를 넣으며 관심을 갖는 사람에게 먼저 친근감이 갈 수밖에.


또 ‘말 잘하는 것’ 보다 ‘잘 말하는 것’이 중요하고, ‘상대가 원하는 것’을 말하기보다 ‘상대가 싫어하는 말’을 안 하는 게 상수라고 했다. 백 번 좋은 말을 하고도 한 마디 말실수로 그간 따놓은 점수를 홀랑 날리기도 하니까. 쏟은 물을 담지 못하듯 돌이킬 수 없는 게 말실수이다. 말이 준 상처는 사과하고 사과해도 상대의 마음에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오죽하면 “말한 입은 삼일 가고, 듣는 귀는 천 년 간다”라고 했을까.


나는 잊은 지 오래인데 들은 사람은 천 년을 기억한다니 섬뜩하기조차 하다. 시카고 공항에서 경험한 일이다. 터미널을 나와 차를 기다리는데 함께 출장 간 친구가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바작바작 담배는 타드는데 마땅히 버릴 데가 없었다. 벙거지를 눌러쓴 거구의 흑인이 빤히 지켜보고 있는 상황에서... 게다가 우리 쪽을 향해 헤죽헤죽 웃기까지 하자 화가 난 친구가 입을 열었다. “저 검둥이! 왜 꺼지지 않고 실실 웃는 거야!” 볼멘소리가 나왔다 하는 순간인데 흑인이 더듬더듬 말을 하는 것이다. “빠리 버리세요. 나 청소해야 해요.”

그날 이 친구는 세 번씩 ‘아임 쏘리’를 외쳐야 했다.


1976년 한 젊은 여배우가 리메이크 영화 ‘킹콩’ 오디션에 나왔다. 경력은 연극무대뿐, 영화 출연은 전무한 여자였다. 각진 광대뼈에 매부리코, 얼굴 조합이 미인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영화 제작자가 이탈리아어로 불평을 했다. “못생겼네. 누가 저런 여잘 불렀어?” 명문대학 출신인 이 미국 여자는 이탈리아어를 알아들었다. “예쁘지 못해 죄송한데, 그래서 어쩐답니까? 보다시피 이게 전분데.” 그녀는 이탈리아어로 또박또박 내 갈긴 후 문을 쾅 닫고 나왔다.


훗날 ‘크레이머&크레이머’ ‘철의 여인’으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주연상을 받고 ‘메디슨 카운티 다리’에서 매력을 발산한 메릴 스트립이었다. 그녀는 오스카상 후보 최다 선정 기록을 지닌 관록 있는 배우가 되었다. 제작자가 사과는 했겠지만 두고두고 후회되지 않았을까?


말을 생각대로 쏟아내면 실수할 확률이 커지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도 있었다. 부장 승진을 앞둔 대기업 김 차장 이야기이다. 회사엔 인품이 훌륭하기로 소문난 창업주가 계신데, 은퇴 후에도 소일 삼아 출근을 계속하고 있다. 가끔은 사적 일을 직원에게 부탁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날도 노 회장이 예전 비서였던 홍보실 김 차장에게 전화를 했다. “나 좀 도와줘야겠네.” 당시 김 차장은 골치 아픈 일로 신경이 곤두서 있을 때였다.


짜증이 난 그가 수화기를 내려놓으며 무심코 한 말이 “아, 돌아버리겠네. 할아버지까지 왜 이러시나 오늘!” 그 소리가 노 회장께 그대로 전달되었다. 한쪽은 끊은 줄 알았고, 한쪽은 수화기를 들고 있었으니까. 이후 상황은 어떻게 전개될까. 일단은 찍혔을 테고, 부장 승진은 날아갔을 것이다. 그런데 노 회장님 인품이 대단한 것이 이를 알고도 모른척해주었고, 게다가 부장 승진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도 않았다.


승진 후, 인사차 들렸더니 노 회장이 악수를 하며 일러주었다. “전화는 항상 상대방이 끊었는지 확인하는 버릇을 들여야 한다네.” 하며 웃더란다. 말귀를 못 알아들은 김 부장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러고 며칠 뒤 비서를 통해 내막을 전해 들어 알게 되었다. 삶의 지혜는 종종 듣는데서 비롯되고, 후회는 대개 말함에서 시작된다. 말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적절할 때 거두는 것이 말의 품격을 높인다. 말 잘하는 사람보다 말실수가 없는 사람을 잘 관찰해 보라. 말하기 고수는 대부분 그런 사람이다. 이런 말이 있다.


“개에게 물리면 통원 치료로 끝나고,

뱀에게 물리면 사나흘 치료로 해결되지만,

사람 말에 물린 사람은 지금도 입원 중.”


말의 고수는 말실수 않는 사람, 그 이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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