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16] 2022. 10. 10(월)
한국 사람에겐 취약한 두 가지가 있다. ‘질병’과 ‘수치’라는 단어. 질병에 관한 한 우리처럼 박식한 민족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갖 정보를 꿰차고, 어떤 증상이 나타나면 지레짐작으로 밤잠을 설친다. 수치에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언젠가부터 계량화된 수치를 맹신하고 부르르 몸을 떠는 증상이 생겼다. OECD 국가에 가입한 후 OECD가 내놓는 각종의 평가 수치를 접하면서 심해진 현상이기도 하다.
OECD 국가의 자살률, 행복지수, 이혼율 등 다양한 방식으로 조사 평가한 수치를 보면 우리는 행복하지 않은 국민이 분명해 보인다. 평가항목마다 대한민국은 대부분 부정 순위 상위에 올라 있으니까. 행복이란 정의도 제대로 내리지 못한 채 “왜 나는 행복하지 않은가?” “내 노년 준비는 왜 이 모양이지?” 인간의 취약한 점을 파고들어 스스로 조급증을 유발한다.
‘각종 불행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면 준비된 사람’이라는, 한 보험 회사의 광고 카피가 얼마나 매혹적인가. 행불행을 앞세워 소비시장을 흔드는 광고 유혹까지 조급증을 부추기고 있다. 덩달아 ‘노년이 편안해야 한다’는 행복 담론이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는 대책이 마뜩하지 않다. 행복은 마치 여유로운 노년 준비가 다인 것처럼, 또박또박 적금 붓고 생명보험 실손보험 한두 개는 필수로 들어야 하며, 여기에 만 보 걷기는 기본, 땀 흘려 운동하고 상조회 가입까지 갈수록 가입 항목을 추가해야 마음이 놓이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이로 인해 부담해야 할 비용은 점점 불어날 수밖에. 혼수 준비처럼 경쟁하듯 남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은퇴란 문제가 코 앞에 와 있다. 은퇴는 일과 노동으로 평생을 헌신한 지친 몸을 내려놓고 편히 쉬는 시기 라야 하는데, 늙고 병들어 지낼 불안이 나의 미래로 엄습해 온다면? 그것에 눌리어 오늘의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할 때, 그것이 현명한 일인지 판단이 흐려질 때가 있다. 내일의 불안을 이겨내려다 소중한 현재를 희생하는 것이 온당할까? 우리가 사는 삶의 현장은 ‘지금, 여기’인데….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나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오지 않은 ‘거기, 미래’ 에다 내 삶을 신탁한다면, ‘지금, 여기’는 미래를 위한 소모적 현장이 되는 건 아닌지. 오지 않은 내일과 뜨겁지 못한 오늘이 불편한 동거를 이어가다가 어느 날 “그래 이거야. 바로 내가 꿈꾼 것.” 이렇게 감탄할 때가 오긴 오는 걸까? 장담할 수 없는 것이 내일인데….
내 젊은 날을 미지의 날에 깃발을 꽂고, 쫓기며 소모하며 달려만 온 것은 아닌지 살아온 날을 돌아보면, 한쪽 가슴으로 검은 그늘이 드리운다. 작은 것에 눈 뜨고 소소한 일상에서 기쁨을 찾고 내 때에 맞는 아름다운 삶을 찾는 것이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방법이다. 그때 비로소 내 인생이 생화(生花)로서 향을 낸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빠른 때라는 위로를 건네면서 ‘지금 여기’부터 살뜰하게 챙기자고. 어떤 경우라도 오늘을 포기하는 일은 하지 말자. 일상의 경계를 좁혀서라도 오늘을 즐기자고 생각했다.
여기저기 아픈 것은 나이가 들며 생기는 일상이려니, 성인병 한둘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이 앓는 질병을 삶의 일부로 받아들이고 더 웅숭깊은 작품으로 승화시켰듯이, 질병도 내 얼굴에 생기는 주름이려니 받아들이고 끝날까지 동행하자. 가는 세월 잡겠다고 용써봤자 축나는 것은 내 몸이고 내 마음엔 주름만 잡힌다. 내가 잘 보듬으면 저도 나를 연민해 주겠지.
50대에 귀에 이명(耳鳴)이 생기고 눈엔 비문증(飛紋症)이 찾아왔다. 귀에서 풀벌레가 쉬지 않고 울어대는 이명은 내 몸을 흔들어 놓는 큰 소음이다. 심한 사람은 잠을 못 이룰 정도로 고통스럽다는 병 같지 않은 병이다. 비문증은 눈앞에 모기가 나는 듯한 현상이다. 난독으로 나타난 증상인데, 맑게 닦인 거울을 보면서 내 눈도 저렇게 깨끗한 시절이 있었지 위로를 건넨다. 눈을 꼭 감았다 떠보지만 없어지기는커녕 신경은 더 쓰인다.
언젠가 황동규 시인이 쓴 ‘비문’이란 시를 읽고 담대하게 생각을 바꾸었다. 나를 위해 소모된 육신의 흔적이라고. 시인도 비문증을 호소하다가 마음을 바꿔 먹었단다. “모기가 좀 날면 어때?”라는 생각이 들면서 ‘날건 말건’ 이란 시어가 떠올라 시 ‘비문(飛紋)’을 썼다고 했다.
.... 늦가을 저녁/ 나무, 꽃, 나비, 새들이 녹는 빛 속에/ 벌레 하나 눈 속에서/ 녹지 않고 날고 있다/ 고개를 딴 데 돌려도 날고 있다/ 눈을 한참 꾹 감았다 뜬다/ 눈물이 고일만큼/ 눈물에도 녹지 않고 날고 있다/ 날건 말건!
여기서 ‘날건 말건’은 자신의 눈에 비문이 보일 때 타이르는 주문일 수도 있겠다. 나도 증세를 느낄 때면 똑같이 주문을 외운다. 이명에 신경이 쓰일 때는 ‘까짓 거 울건 말건!’ 애써 외면해 버렸다. 이명, 비문증 다 노화와 관련된 질병으로 완치가 어렵지만, 생각을 바꾼 후로 자각증은 한결 좋아졌다. 신경이 덜 쓰이고.
인생도 그런 것 같다. 어차피 피하지 못할 환경이라면 타박할 것이 아니라, 적응하며 사는 게 최선책이다. 행복과 불행은 결국 마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그것이 예전과 지금의 달라진 나의 모습이어야 한다. 마음을 홀리는 중세의 마법사 주문이 그냥 나올 리 없다. 오랜 세월을 정진하여 천리를 깨치고 하나의 주문으로 인생 문제를 풀었다.
‘아브라 카다브라(abra cadabra)!’
‘내가 말 한대로 될 지어다!’
-소설가/ daum cafe 이관순의 손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