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17] 2022.10.17(월)
우리는 세대를 구분할 때 종종 실수를 저지른다. 애나 어른이나 한 명 한 명이 다른 인생이고 그대로가 작은 우주인데, 그렇게 살피지 못하고 한 묶음으로 처리할 때가 있다. 칠팔십 대를 생물 연령만으로 따져 사랑방 상노인으로 규정하고, 사오십 대를 싸잡아 아저씨로 병렬 처리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다 시 한 편이 눈에 들어왔다.
❝사람이 온다는 것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가 함께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정현종 시 ‘방문객’ 중
세월에 휘감겨 살아온 사람들을 향한 상찬 같기도 하고, 용하게 인생살이를 살아낸 사람들의 삶에 현미경을 들이대는 것 같기도 하다. 일생을 산 사람은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대로 개선장군이다. 보이지 않은 가슴속에는 비바람에 시달리고 삭풍 한설을 견디느라 얼마나 많은 상처와 아픔을 보듬고 있을까. 인생을 뒤돌아보면 저마다 주어진 한 생애를 눈물겹게 사는 것이니, 그곳에 시시한 삶이란 있을리 없다.
사람들에 대한 선의는 인간의 의무이다. 사람이 사람을 선의로 대하지 못한다면 인간의 가장 중요한 의무 하나를 이행하지 않는 것이다. 우스꽝스럽고, 좀은 누추하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도 존중하지 않으면 나 또한 존중받기를 포기하는 행위이다. 사람의 외모는 다 달라도, 속 사람은 다 같은 귀함이다. 잘났든 못났든 사람에게는 각기 유아독존의 영역이 있으니까. 누가 나를 정신적으로 피곤하게 하고, 혐오스럽게 해도 “저 사람의 사는 방법이려니”하고 넘길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원만하게 더불어 사는 것이 지혜이지, 까칠하게 보이는 것이 잘 사는 삶이 아니다.
“넌 사는 게 왜 그 모양이냐?” 걸핏하면 옆사람을 향해 핀잔을 주는 친구가 있었다. 하는 말이 좀 어설프고 말이 조금만 주제를 이탈해도 면전에서 쏴 부치는, 그래서 대포라는 별명을 얻은 친구였다. 그러던 그가 위암 수술을 받았다고 해서 병원으로 병문안을 갔다. 체중이 10kg 이상 빠지고 머리에 모자를 눌러쓰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자 하니 세월이 저렇게도 흘러가는구나 싶었다.
자기 자신은 바꾸지 못하는 사람이 남을 바꾸겠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나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유일하게 약발이 잘 듣는 한 가지가 있다면 사람을 인격체로 예우하고 사랑으로 감싸는 일뿐이다. 세상을 염세했던 쇼펜하우어도 ‘만인에게 할 일은 오직 선의로 대하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시 하나 더, 장석주의 ‘대추 한 알’을 소개해 본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날 ❞
대추 한 알에 우리 인생을 담은 시인의 관찰이 웅숭하고 광휘하다. 잘 생긴 대추나 못 생긴 대추나 똑같이 추운 밤을 견뎌냈다. 비바람과 천둥, 번개, 벼락을 맞으며 상처를 보듬었다. 하나하나 우주의 사랑을 듬뿍 받아 결실한 것들이다. 대추처럼 사람도 둥글둥글 되기까지, 제혼자 노력으로는 될 리가 없다. 오스스 몸을 떨며 무서리를 맞고, 쨍쨍 내려쬐는 땡볕에 그을려야 했다. 초승달이 둥근달이 되고 이지러지기를 또 얼마나 바라보며 기다렸을까.
시련을 이기지 못하면 붉고 둥근 대추 한 알이 절로 영글 수 없듯이, 그래서 사람이 사람을 위로하지 못하고 구박함은, 선의를 저버리는 것이다. 같은 자리에서도 화려하게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뒤늦게 서리를 맞으며 꽃잎을 여는 꽃도 있다. 예로부터 사람을 불의로 예단함을 죄악이라고 했다. 물을 주고 북을 주는 것은 사람의 몫이라 해도, 열매를 맺게 하는 일은 오로지 하늘의 소관이 아닌가.
이 나이가 되니 이따금 살아온 내 몸이 기특하고 대견스러울 때가 있다. 까칠한 상전을 모시느라 몸인들 얼마나 고생이 심했겠나! 까다로운 성질을 못 이기고 세상에서 당하면 당한 대로, 아프면 아픈 대로, 몸을 구박하고 마구 굴려 많은 탈을 불렀다. 이제는 그렇게 쇠잔해진 몸을 상전으로 모시고 살아야 할 나이가 되었다. 이를 잘 깨치는 것이 천리를 아는 일이다. 바퀴의 위아래는 시간이 되면 바뀌는 법이다. 어제는 위였다가 오늘은 아래로 내려온다.
나이가 들면 마음도 잘 토라지지만 몸은 더 잘 삐친다. 대수롭지 않은, 사소한 일로 몸이 삐칠 때는 나 스스로 깜짝깜짝 놀란다. 큰 병이라도 찾아오면 어쩌나. 그러면서 깨달았다. 노인의 마음에는 칭얼대는 아이가 살고 있다는 것을. 칭얼대고 투정 많은 어린아이의 엄마일수록 아이를 달래는 그만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 기술이 하루아침에 생겨날 리 만무다. 오랜 시간 아이에게 볶이고 속을 끓여야 쌓이는 내공이다. 우리의 삶도 그러야 하리라.
나이가 든다는 건 마음에 욕망을 거두고 감사의 파동을 키우라는 것이다. 노인의 일상을 편하게 가꾸는 방법이다. 인생에서 궁극적으로 유익을 주는 것은 감사한 마음에 있다. 우리는 몸을 내 것이라 착각하고 멋대로 대하며 살아오지 않았나? 일생을 거역하지 않고 나를 위해 헌신하고 충성한 몸에게 감사한 마음을 품을 때가 되었다. 몸과 분쟁하지 말고 서로를 긍휼히 여기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몸이 칭얼대지 않는다.
“못난 나를 위해 한평생 수고해줘 고맙네. 끝까지 잘 좀 부탁하네.”
오늘도 나의 가슴에는 징징대는 어린아이가 살고, 나는 그와 화해 중에 있다.
-소설가/daumcafe/이관순의 손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