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26] 2022.12.19(월)
일기책을 뒤적이다 원치 않은 기록과 마주했다. 1999년 12월 12일 내가 남긴 지문은 선명했다. 시기적으로는 ‘뉴 밀레니엄’ 시대가 열린다고 온 세상이 과도한 꿈에 부풀어 있을 때였다. 2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당시 몸에 일었던 전율은 지금도 기억된다. 그 날짜 언론들은 몸도 시원치 않은 소아마비 초등학교 2학년 여아가 계모의 음흉한 계획과 장기적인 학대로 죽었다는 쇼킹한 사건을 전하고 있었다. 이 비보는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계모가 1년 넘게 몸에 해로운 약을 계속해 먹인 것이 경찰 수사로 밝혀졌기 때문이다.
여아 책상엔 2년 전 죽은 엄마가 생일 선물로 사준 안데르센 동화집이 꽂혀 있고, 아이는 수시로 그 책을 탐독한 것으로 알려졌다. 안데르센 전집 7권 중 유난히 낡아 보인 책이 ‘성냥팔이 소녀’ 였다고 한다. 얼마나 읽고 또 읽었으면 해질 정도가 되었을까. 담임선생은 아이가 늘 그 책을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을 보고 조용히 불러 물어보았다. “이 책이 그리 좋으니? 뭐가 좋아?” 한참 뜸을 들인 아이가 내놓은 말은 “슬퍼서”였다. 선생님은 아이를 붙들고 오랜 시간을 함께 하며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음 문을 연 아이는 “커서 안데르센 선생님처럼 동화책을 쓰고 싶어요.” 동화작가라는 야무진 속내를 비치기도 했다.
선생님은 아이에게 안데르센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안데르센은 아주 가난한 구두수선공 아들로 태어나, 아빠를 일찍 여의고 엄마는 재혼하고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랐단다. 하지만 안데르센은 그런 환경을 이겨내고 수많은 아름다운 이야기를 쓸 수 있었지. 네가 좋아하는 ‘성냥팔이 소녀’는 안데르센이 어린 시절 가난한 엄마를 모델로 썼다고 해. 놀라운 일이지?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을 거야. 꼭 될 거야!” 그날 이후로 아이를 더 따뜻하게 관심을 갖고 봐 왔는데, 이런 비극이 찾아왔다고 슬퍼했다.
불우한 소녀에게 실낱같은 꿈을 이어준 안데르센. 그 꿈을 찢어버린 계모란 이름의 여자. 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사람에게 미친 영향은 이렇게 달랐다. 철자법도 서툴었던 안데르센 소년은 거칠었던 삶의 질곡을 환희로 승화시켜 덴마크의 자존심이 되었고, 안데르센이 죽자 나라가 나서서 장례를 국장(國葬)으로 치를 만큼 예우를 갖춰 애도했다. 강단에 있을 때, 나는 학생들에게 곧잘 안데르센과 쇼펜하우어를 비교했다. 국적은 달라도 두 사람은 동시대를 살았고, 거부인 아버지 덕에 온갖 영화를 다 누리며 자라고도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자가 되었다고.
환경이 삶을 규정하지 못한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그래도 끝말은 ‘성냥팔이 소녀’가 해피엔딩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을 때가 있다. 안데르센은 불쌍한 소녀를 왜 얼어 죽게 만들었을까? 사무침은 고통을 수반한다. 하지만 고통은 사람을 의연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 소녀도 살았으면 지금쯤 서른 살쯤? 어쩌면 잘 자라서 소원한 대로 동화작가가 되어 아이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안데르센은 ‘성냥팔이 소녀’ 외에 ‘미운 오리 새끼’ ‘인어 공주’ ‘벌거벗은 임금님’ 등 보석처럼 반짝이는 160여 편의 동화를 세상에 남겼다. 그의 동화 속에는 늘 아름다운 환상 세계가 펼치어 있고, 낭만적인 세계가 녹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동화는 곧잘 비극으로 끝나곤 했다. 부잣집 창 밑에 쪼그리고 앉아 성냥불로 몸을 녹이던 ‘성냥팔이 소녀’는 차가운 주검으로 남고, 짝사랑한 왕자를 만나려고 목소리를 팔아 두 다리를 얻은 ‘인어공주’는 끝내 바다의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안데르센의 애상적 관점이 투영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안데르센은 말년에 자서전을 냈는데, 세 번을 고쳐 낼만큼 애착을 보였다. 자신의 수많은 작품의 탄생 배경과 집필 동기 등을 자상하게 서술하여 안데르센 작품 주석서라는 평가가 따랐다. 그는 책머리에 “역경은 내 삶의 원동력이었으며, 어떤 요정이 도왔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좋은 삶으로 인도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자신의 삶을 자긍 했다.
서양의 문학사가(文學史家) 들은 괴테의 ‘시와 진실’을 ‘루소 고백록’, ‘아우구스티누스 참회록’, ‘크로포트킨 자서전’과 함께 안데르센의 ‘내 생애의 이야기’를 세계 5대 자서전으로 꼽는다. 12월이 오고,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리고, 딸랑딸랑 구세군 자선냄비가 종소리를 낼 때면 안데르센이 생각난다. 그리고 추위에 떨고 있는 ‘성냥팔이 소녀’가 떠오른다. 그러다 문득 창을 열어보고 싶은 충동이 인다. 혹시 내 창밖 아래 그 누군가가 떨고 앉아 있는 건 아닐까? 이태원 참사, 열 달째 지속되는 우크라이나 전쟁, 끝 모를 경기침체 등 유달리 마음을 아프게 한 일들이 많았던 올 한 해를 보내면서 더더욱 그런 생각이 깊어진다.
-소설가/ daumcafe 이관순의 손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