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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나 Nov 15. 2022

지도가 변했다

외향적인 사람이 내향적인 사람보다 코로나 시국을 견디기 어려웠다고 하네요. 나 역시 외부 활동에서 에너지를 얻는 외향성이 좀 높은 사람이어서 집안에만 있던 긴 시간이 조금은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기억에 남는 것들이 있습니다. 도서관에서 만났던 다양해진 큰 활자 책 덕분에 편하게 책을 읽는 기쁨을 누렸고요, 또 새로운 곳에서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며 호기심을 채워주는 여행 유튜버들의 영상을 보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냈습니다.


중학교 때 수업을 재미있게 하셨던 영어 선생님이 계셨어요. 어느 날 기억술의 효과에 대해 설명하시다가 기억술을 통해 외우고 있던 세계지도를 칠판에 그리셨어요. 신기했죠. 기억술을 모르던 나는 반복에 반복을 거듭하면서 세계지도를 익혔습니다. 지도로 그려진 지역은 평면 형태로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었죠. 덕분에 오래전 세계지리를 가르칠 때, 세계지도를 칠판에 바로 그려가면서 수업을 했어요. 그릴 때마다 학생들의 "와"하는 함성이 나왔지요. 나름 뭔가 생생한 수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어떤 지명을 보았을 때, 가보지 못한 지역은 점, 선, 면으로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딱 지도에서 보여주는 그림처럼요. 하지만 직접 보고 관찰한 곳의 모습은 3차원 공간으로 변합니다. 선으로 나타내는 도로도 3차원 풍경으로 그려집니다. 여행을 좀 다녔다고는 하나 세상은 넓고 모르는 곳은 많습니다. 코로나 기간, 집콕하면서 많은 여행 유튜브 영상을 보았습니다. 평면으로 기억되었던 지구상의 여러 지역들이 어느새 2차원 평면에서 3차원 공간으로 바뀌더군요. 내 머릿속에서는 지도가 변하고 있었습니다.


사람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여행 중 겪는 에피소드를 모아서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영상들이 많이 있어요. 영상을 통해 지역민들의 생활하는 모습과 주변 환경도 보게 되고요. 덕분에 지역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는 것 같습니다. 우연히 영상에서 지역을 보는 시각이 매력적인 유튜버 두 명을 만났습니다. 그들의 공통점을 찾아보니 지리학을 전공했더라고요. 지역을 보는 관점과 관심사의 핵심 포인트를 짚어서 전달하는 방법이 맘에 들었습니다.   


지난 여름 유튜버 안수지는 알프스 산맥 주변에서 한 달간 캠핑을 했던 영상을 보여주었습니다. TV 프로그램 '텐트 밖은 유럽'이라는 프로그램이 단편소설이라면, 안수지의 영상은 장편소설 같았습니다. 오스트리아, 스위스, 이탈리아에 속해 있는 거대한 신기조산대 알프스 산맥을 생생하게 보여주었죠. 영화 같은 풍경들이 아름다웠습니다. 이탈리아 돌로미티에서 보여준 웅장한 돌 산 '트레치메'의 모습도, 그에 대한 적절한 해설도 좋았어요. 나폴레옹이 통과했다는 지그재그로 굽이치는 만년설의 고타드 패스도 인상적이었습니다.


2006년 우리 가족도 스위스에서 이탈리아로 넘어갈 때, 알프스 산맥을 지나가 보았습니다. 위험한 고타드 패스가 아닌, 빠르게 통과할 수 있는 고타드 터널을 이용했었죠. 그 당시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터널이라고 해서 살짝 겁을 먹고 지나갔어요. 깜깜하고 두려웠던 긴 터널 위에 이렇게 비현실적으로 아름답고 위험한 길이 있으리라 상상도 못했습니다. 살짝살짝 보이는 도로 옆 낭떠러지는 무섭지만, 그 건너 보이는 풍경은 기가 막혔습니다. 현재 이 고개는 여름 기간에만 이용할 수 있다네요.


이탈리아의 관광 가이드 유즈만은 런던에서 유학했던 유튜버입니다. 그가 보여준 런던 남동부에 위치한 그리니치 천문대의 본초자오선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세계 시간의 기준이 되는 그 선을 볼 수 있을 거라 생각을 못했거든요. 오래전 런던을 방문했을 땐, 대영 박물관 유물에 관심이 많았던 것 같습니다. 이제 와서 별스럽지 않은 인위적인 선 표시에 왜 마음이 움직이는 걸까요. 표준시라는 개념을 확인할 수 있어서 일까요, 아니면 그 선에 따르는 시간을 실생활에서 사용하기 때문일까요.


유즈만의 영상 중에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가 나옵니다. 벨기에의 안트웨르펜(Antwerpen)에 있는 성모 마리아 성당 앞 광장에는 주인공 네로와 파트라슈가 보도블록을 덮고 누워있는 조각이 있고요, 성당 안에는 네로가 너무나 보고 싶어 했던 루벤스의 '십자가에서 내려짐'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유즈만이 이 그림을 황홀하게 바라볼 때, 그의 감격이 고스란히 전달되었습니다. 바로코 미술의 정수답게 화려한 색감, 아주 섬세한 표현이 영상으로도 느껴졌습니다.


이제 새롭게 보이던 3차원 공간의 지역에서 예술의 향기까지 느껴지기 시작했어요. 게다가 유즈만과 그의 동료 덕분에 서양 미술의 흐름까지 어렴풋이 정리되어 가고 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과 그 이전의 그림 차이도 알게 되었어요. 르네상스 이후 바로크 미술부터 후기 인상파 고흐 그리고 그의 영향을 받은 현대 표현주의까지 나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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