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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은나 May 08. 2023

천사를 기억하고 있다

착하고 어진 사람을 보면 천사 같다고 말한다. 천성이 느긋하고 부드러운 아버지를 닮은 큰언니를 우리 집 막내는 천사 같다고 했었다. 책을 좋아하고 동생들과 노래 부르기를 좋아했던 큰언니는 어머니처럼 동생들을 챙겼다. 내 기억 속의 언니는 부끄럼을 많이 타서, 어머니가 동네 가게에 심부름을 시키면 엄청 난감해했다. 그럴 땐 동생 찬스를 써서,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동생이 사 온 물건을 받아서 어머니께 갖다 드리곤 했다.


언니가 결혼했을 때, 살림을 잘할 수 있을까 속으로 걱정했었다. 내 기준으로 보면 물건을 살 때는 재고 따지고 값을 깎아야 하는데, 언니는 물건 값을 깎질 않는다. 나중에 언니의 신혼집 부근 동네 시장을 따라가 보았다. 이미 지나가는 언니를 알아보는 단골 상점 아주머니들이 있었다. 가게 주인들이 알아서 좋은 물건을 골라주고 적당한 가격을 받았다. 언니는 인간관계를 편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친척 중에 친하고 싶지 않은 깍쟁이 사촌이 있었다. 언니는 그 사촌 언니하고도 잘 지냈다. 그들 만의 고운 정, 미운 정이 있겠지만, 언니의 양보와 베풂이 그 둘의 관계에 바탕이 된 듯했다. 딱 지금 내 나이 즈음에 언니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내 편이었던 좋은 언니를 한참 동안 마음에서 떠나보내지 못했다. 시간이 흐른 뒤 언니를 놓아주었다. 어렵고 복잡한 세상을 떠나 좋은 곳에서 평안을 누리라고....


우리 집 자매 중 나는 가장 예민한 기질을 가지고 태어났다.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다른 자식들에 비해 키우기 쉽지 않았던  딸이었을 것이다. 어릴 적 시골 외갓집에서 언니와 같은 잠자리에서 자면서도, 유독 나만 불편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이런저런 생각이 많고 따지기를 잘하니까, 가끔 똑똑하다는 말을 듣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내게 없는 푸근함과 느긋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국민학교 1학년쯤, 한 동네에서 살던 상희라는 친구가 있었다. 인상 좋고 느긋한 성격을 갖고 있던 상희의 얼굴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어느 날 두 친구가 다투고 있었다. 옆 집에 살던 경아가 "너네는 가난하지? 엄마도 없지?"라며 상희를 공격했다. "경아야, 그런 말하는 거 아니야. 그러지 마" 상희는 화내지 않고 아기 달래 듯 경아에게 했다. 다른 말들도 오갔을 텐데, 차분하게 말하는 그 장면만이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나였더라면 어땠을까. 경아의 약점을 찾아 바로 반격했을 것이다. 그 나이 또래 친구들에게서 볼 수 없었던 상희의 어른스럽고 푸근한 모습을 보며 천사 같다고 생각했었다. 어쩌면 평범하지 않은 가정환경이 상희를 빨리 철들게 할 수도 있었으리라. 어쨌든 마음이 넉넉하고 부드러운 그 아이의 인성은 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오십 대가 되면서 상희에 대한 부러움이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그건 그때쯤 나의 마음이 좀 푸근해졌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얼마 전 텔아비브를 향하는 비행기를 타고 있었다. 12시간 반 동안 좁은 기내에서 내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앞으로 이코노미석을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앞 쪽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몸집이 작은 애엄마가 아기를 안아서 달래고 있었다. 잠시 후에 보니 우리 일행 중 Y권사가 그 아기를 안고 있었다. Y권사는 힘든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 발 빠르게 다가가는 천사 같은 사람이다.


아기 엄마는 한국에서 아기를 낳고 8개월 동안 키운 후, 남편이 있는 이스라엘로 돌아오는 길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입국장에서 보니 한국에서 가져오는 짐이 어마어마하게 많았다. '물가가 비싼 이스라엘에서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겠지'라고 생각하던 그 순간, Y권사는 벌써 아기 엄마의 짐을 챙겨주고 있었다. 그 후 이스라엘에서 만난 가이드 목사님으로부터 이 부부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기 아빠가 목사님의 후배이고, 많이 감사해한다는 얘기를 전해 주셨다.


Y권사는 교회 화장실을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한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십 년 넘게 빠짐없이 해오고 있다. 또 지하철역 부근 무료밥차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음식 만드는 봉사를 하고 있다. 주변의 천사 같은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음식을 빠르고 쉽게 잘 만든다. 김장을 일부러 많이 해두었다가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친구도 있고, 오래된 동네의 할머니들께 음식을 직접 만들어 가끔씩 점심을 대접하는 친구도 있다.


공통점이 또 있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그리 넉넉하지 않아도 베풀 때는 진짜 부자처럼 베푼다. 시기, 질투가 생길 만한 대상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것 같다. 부지런한 이들의 시선은 자신들보다 낮은 곳을 향해 있다. 가까이에 이런 친구들이 있어서 감사하다. 행동으로 섬기는 그녀들의 마음이 귀하게 여겨진다. 천사 같은 이들을 떠올리면 세상은 아직 살 만한 곳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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