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운동장, 오색 만국기가 바람에 살랑이며 흔들린다. 운동장의 한쪽에서는 돗자리를 깔고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소리, 다른 한쪽에서는 흥겨운 음악이 울려 퍼진다. 오늘은 초등학교 가을 운동회가 열리는 날이다.
유난히 상쾌한 아침, 나는 평소보다 두 시간이나 일찍 눈을 떴다. 오늘은 여덟 남매 중 막내 동생의 마지막 운동회가 있는 날. 어머니께서 며칠 전부터 꼭 참석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셨다. 하지만 그 말씀이 아니었더라도 나는 가려고 했을 것이다.
오랜만에 모교를 다시 밟고 싶었으니까. 나와 일곱 남매, 그리고 어머니까지도 졸업한 학교. 어릴 적 친구들과 뛰놀던 그 운동장, 낡은 책상에 남겨진 연필 자국, 선생님의 따뜻한 미소까지. 모두 내 가슴속 깊이 새겨져 있는 어린 시절이 고스란히 깃든 곳이었다.
시간이란 참 신기한 것이다. 분명 오래된 기억 같은데도, 어느 순간 마음속 깊이 생생하게 살아나는 날들이 있다. 특히 어린 시절의 추억은 내 삶의 뿌리처럼 어느 순간 불쑥불쑥 치고 올라온다.
학교를 향해 가는 길, 마음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찾는 곳이라 그런지 묘한 설렘이 밀려왔다. 학교 건물은 그대로일까? 운동장 한편에 서 있던 이승복동상과 책 읽는 소녀상은 아직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을까?
철없던 시절, 고무줄을 싹둑 잘라버리고 도망가던 남자아이도 생각났다. 혹시 오늘, 그 아이도 학부모가 되어 이곳에 와 있을까? 이런저런 생각이 겹쳐지면서 가슴이 벅차올랐다.
운동장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본부석 옆 계단에 자리를 잡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자그마한 돗자리 위에는 고구마, 밤, 떡 등 손수 준비하신 음식들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무슨 잔치라도 하세요?” 라며 농을 던지며, 얼른 고구마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우리 7남매가 한자리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과는 상관없이 운동회는 활기차게 진행되고 있었다.
휴식시간이 주어지자 아이들은 부모님을 찾으려 두리번거렸고, 학부모들은 본부석에서 서로 인사를 나누며 웃음꽃을 피웠다. 하지만 어머니는 본부석의 학부모들 사이에 앉지 않으셨고, 젊은 엄마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문득 가슴이 먹먹해졌다. 8남매 막내의 운동회날, 어머니는 7남매를 모두 불러 모은 이유는 지금 운동장에 서있는 아이가 막내이고, 내가 그래서 이 만큼 나이 먹은 거다라는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은 거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잠시 후, 부모 참여 경기 시간이 되었다. 스피커에서 흥겨운 음악이 흐르고, 사회자의 목소리가 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부모님들 중 한 분이 나와서 아이들과 함께 달리기를 해야 한다는 안내가 계속해서 나왔다. 어머니는 나와 동생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네 동생이 나가는 게 좋겠지? 나는 나이가 많아 민망하구나."
운동회는 계속해서 이어졌고, 나는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운동장 한가운데에서 또래 친구들과 깔깔거리며 뛰노는 모습이 보였다. 내년이면 초등학생이 될 우리 아이. 오늘처럼 운동회에 가게 되면,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이 자리에 서 있을까?
문득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아이의 가정환경 조사서에 ‘무직’이라고 적어야 한다는 현실이 나를 짓눌렀다. 친구들 중에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이들도 많고, 지역 유지가 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이루어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어머니는 나이 때문에 나서지 못하지만, 나는? 나는 아이의 학교에서 어떤 엄마가 될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망연히 앉아있는데, 갑자기 딸아이가 환한 얼굴로 뛰어와 나를 끌어안았다. 그 작은 손길이, 따스한 체온이, 내 안에 쌓인 의문을 단번에 해소해 주었다..
‘그래, 지금부터 시작하면 돼. 늦어도 괜찮아.’
인생은 지금 시작하는것이 가장 빠르다는 말처럼 중요한 것은 언제 시작하느냐 보다 ,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가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남편이 쓰던 책을 꺼내 들고 매일 조금씩 공부를 이어갔다. 처음에는 힘들었지만, 중간에 포기하게 된다면 아이에게 할 말이 없을 것 같고, 아이에게도 포기라는 것을 가르치게 될까 봐 염려가 되어 결심을 포기하지 않았다.
또 시험에 떨어지면 핑계를 댈까 봐 남편이 출근하고 없는 시간에 몰래 공부를 했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다짐했다.
‘볼펜 100자루를 다 쓸 때까지 멈추지 않겠어.’
그리고 6개월 후 시험에 합격하고 직업을 갖게 되었다. 만약 그날, 동생의 운동회에 가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주저앉아 있었을 것이다. 내 아이에게 당당한 엄마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어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꾸준히 운동도 시작했다. 공부할 때 내 옆에서 낙서를 하던 딸도 지금은 자신이 목표한 일을 꾸준히 해내는 어른이 되었다.
거창한 성공이 아니라도 괜찮다. 중요한 것은 한 걸음 한 걸음, 멈추지 않고 나아가는 것.
60년을 살고도 여전히 믿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빠르지 않아도, 느리지만 쉼 없이 가다 보면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을. 마치 거북이가 결국 우승을 차지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