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에 멈춘 역, 그리고 흐르는 강
반나절이나 등에 업혀 있던 아이가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손을 뻗어 아이의 엉덩이를 만지자 물주머니가 매달린 듯 축축하고 묵직했다. 버스를 타기 전 진부에서 채운 기저귀가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하지만 차가운 바람이 휭휭거리고 아기를 안고 탄 젊은 여자를 궁금한 눈으로 쳐다보는 사람들이 있는 기차 안에서 기저귀를 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여량역까지는 이제 30여 분 남짓. 기차가 멈추는 순간, 포대기를 풀고 아이의 기저귀부터 갈아주리라 마음먹으며 등을 토닥였다.
창밖은 어느새 어둠이 내려앉고, 집집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나전역에서 여량역으로 가는 길은 여랑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듯했다. 기차는 산과 산 사이를 느릿느릿 통과했다. 천천히 나아가던 기차는 때때로 속도를 내다 이내 다시 늦추었고, 그럴 때면 나는 이 기차가 영영 바깥세상으로 나오지 못할 곳으로 가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산비탈을 돌자 강이 보이기 시작했다. 저 강은 남편이 주말에도 집에 오지 못할 때면 낚싯대를 들고 찾던 곳일까. 강바닥에 누워 하늘을 올려다보았다던 그 강.
아득한 기억이 떠올랐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 건넜던 평창강에서 헤어져 살아야 할 것을 짐작이나 했을까?
그가 외로움을 달래던 곳, 그 외로움이 강물에 섞여 흘러가 버렸을까. 김이 서린 창을 소매로 닦아내며 뒤로 멀어지는 강을 눈으로 좇았다.
비둘기호는 마치 시간을 거스르는 듯,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앞으로 나아갔다.
남편은 역에서 기다리고 있을까? 혹여 내가 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돌아가 버리지는 않았을까? 돌아갔다면 어떻게 수소문해서 찾아야 할까? 하지만 아이를 보기 위해서라도 기다릴 것이다. 불안과 기대가 엇갈렸다.
여량역에 도착하자 기차 문이 열렸다. 등에 업은 아이를 포대기로 단단히 감싼 채 커다란 보따리를 들고 서둘러 내렸다. 저녁 6시의 여량역은 이미 어둠 속에 잠겨 있었고, 철길을 비추는 가로등 불빛은 흐릿했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철길에서 바라본 풍경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 고요했다. 지붕을 맞댄 집들의 창문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은 꿈처럼 아스라이 흔들렸고, 깊은 산골에 밤이 내려앉으며 마을 끝은 적막에 휩싸였다.
바람에 삐걱대는 역사 문을 바라보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각자의 사연을 남겼을 곳. 누군가는 나처럼 사랑하는 이를 만나러 왔을 것이고, 또 누군가는 이별의 아픔을 안고 떠났을 것이다.
오래된 영화 필름처럼 역사 문은 그 모든 희로애락을 품고 있는 듯했다. 먼 훗날 내가 다시 이곳을 찾는다면, 여량역은 지금의 이 기억을 속삭여 줄 것만 같았다.
기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앞서 역으로 들어갔다. 차가운 밤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나는 얼른 포대기를 아이 목까지 끌어올렸다. 그 순간, 누군가가 보따리를 낚아챘다. 남편이었다. 그는 조용히 아이의 포대기를 잡아끌어 올리며, 아무 말 없이 역 안으로 들어가자고 손짓했다.
역 안에 들어와 아이를 포대기에서 내려 나무 의자에 눕혔다. 옷매무새를 고쳐 입고 나도 옆에 앉았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창문을 통해 스며들었다. 불빛에 미세하게 떠다니는 먼지가 제멋대로 춤을 추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문이 열리는 틈을 타 찬바람이 들어오고 고양이 한 마리가 조용히 역 안으로 들어왔다. 한참을 두리번거리던 고양이는 중앙에 놓인 난로 옆 장작에 조심스레 몸을 올렸다.
남편이 역무원 사무실로 들어갔다. 안쪽에서 서류를 정리하는 그의 모습이 매표소 창문을 통해 보였다.
남편은 늘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조금 달라 보였다. 모아 쥔 손에서 한 장의 서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는 재빨리 서류를 주워 올리고 탁탁 소리를 내며 각을 맞추었다. 흔들림 없는 그 손끝에서, 묘한 조급함이 스쳤다.
서류를 정리한 남편은 아이를 품에 안고 보따리를 받아 들었다. 바람과 함께 들어온 고양이가 뒤따라 나오더니 마을을 향해 달려갔다.
역사를 나서며 철길 너머에 있는 강을 바라보았다.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물결이 잔잔히 흐르고 있었다. 그 강물은 모든 기억을 품고 흘러가리라. 그리고 언젠가 우리가 다시 이곳을 찾을 때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아 있으리라.
그리고 40년이 흘렀다.
아이를 데리고 찾았던 여량역을, 이번엔 남편과 함께 다시 찾았다. 그날의 흔적을 더듬으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오래된 간판, 빛바랜 벤치, 한쪽 구석에 놓인 낡은 난로까지도 그대로였다. 이름은 아우라지 역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모습에 안도하며, 내 가슴 한편에 쌓여 있던 시간들이 스르르 풀어지는 듯했다.
그 시절이 그리웠다. 기억 저편에서 희미하게 떠오르던 순간들이 선명해졌다. 눈물이 차올랐지만, 남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아 강으로 향해 달려갔다. 강물은 여전히 같은 흐름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이곳을 마지막으로 찾았던 날, 등에 업힌 아이는 이제 성장하여 가정을 이루었고, 자신의 아이까지 품고 있다.
문득, 그 아이는 그때의 여량역을 기억할까? 남편은? 아니면 나 혼자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걸까.
햇아이를 등에 업고 남편을 만나러 오던 그 시절,
기적 소리 너머로 스미던 설렘, 손끝에 닿던 기다림의 떨림, 아이와 내가 돌아간 후 아이가 가지고 놀던 풍선을 바라보며 눈물이 났다던 남편, 이제는 손에 잡히지 않는 시간들이었지만, 그곳은 여전히 내 젊은 날의 한 조각으로 아련히 남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