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사랑

by 속초순보기

맑은 바람이 처마 밑을 스치던 아침, 나는 밥을 먹고 난 뒤 이불을 끌어당기며 졸린 눈을 비비고 있었다.

설거지를 마친 어머니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방으로 들어오더니 조용히 말씀하셨다.“엄마랑 저 앞산에 좀 다녀오자.”“어… 앞산을 왜요?”반쯤 감긴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킨 내게 어머니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부드러웠지만 다급했다.


어머니는 낡은 다섯 단 장롱을 열었다. 세월에 벗겨져 자개 무늬가 희미하게 남은 서랍 속에서 어머니는 곱게 다린 하얀 치마저고리를 꺼내 들었다. 마치 오늘이 오래 기다려온 날인 듯 가지런히 옷깃을 여미고 말했다.

“얼른 옷 입어라.”마루에 서니 가을 햇살이 쏟아지고, 마당에서는 닭들이 톡톡거리며 모이를 찾고 있었다.


마을길을 따라 십여 분쯤 걸어가자, 황금빛 벼가 바람결에 쉬익쉬익 소리를 내며 파도처럼 일렁였다. 논둑을 따라 난 코스모스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춤을 추었다.엄마의 손엔 누군가에게 건네려는 듯 갓 꺾은 코스모스가 수줍게 들려 있었다.하얀 치마저고리 위에서 그 꽃들은 더욱 선명하고 애틋한 빛을 띠었다.


엄마의 발걸음이 향한 곳은 키가 훌쩍 자란 코스모스가 빽빽하게 피어 있는 산모퉁이였다.바람이 스치면 꽃들이 서로의 어깨를 부딪히며 작은 비밀을 나누듯 흔들렸다.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꽃 사이로 들어가더니 이내 보이지 않았다.나는 코스모스를 뜯으며 혼잣말했다.“엄마가 나온다, 안 나온다…”꽃잎 따기를 몇 번 반복한 뒤에야, 코스모스 사이에 정지된 듯 서 있는 어머니의 실루엣이 보였다.


어머니의 두 눈은 길 잃은 새처럼 허공을 헤매고 있었다. “여기라고 했는데… 여기라고 했는데… 아무 흔적도 찾을 수 없네.”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뭐가요… 뭐가 없다는 거예요?”


잠시 침묵이 바람처럼 지나가고, 어머니는 꽃잎보다 더 가벼운 목소리로 고백했다.“너에게는… 오빠가 되는 아이가 있었단다.”그제야 나는 짐작했다.어머니가 찾고 있던 것은 이름도, 표지도, 흔적도 남기지 못한 아이의 무덤이었다는 것을.



부모에게 자식이란 어떤 의미일까. 깊은 우물 바닥처럼 끝을 알 수 없이 깊고, 아득하여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마음일 것이다.어머니는 늘 “열 손가락 깨물어 보아라,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그때의 나는 철없이,“깨무는 강도에 따라 아프고 덜 아픈 것뿐이지,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냉정하게 말하며 어머니의 마음을 부정하곤 했다.


사람들은 자식을 잃은 아픔을 ‘단장(斷腸)’이라 한다.창자가 끊어지는 듯한 고통.그 끊어짐은 어머니의 삶 한가운데 깊은 골짜기를 만들었고, 그 골짜기는 우리 여덟 남매의 웃음으로도, 햇살로도, 세월이라는 물결로도 완전히 메워지지 못했다.나는 어머니의 눈빛이 가끔 멀리 지평선을 바라보듯 아득한 이유가, 우리 형제들의 무게 때문이라고만 여겨왔다.


마당 한가운데를 팽이처럼 빙글빙글 돌며, 여덟 남매가 해맑은 웃음 파편들을 공중에 흩뿌리며 술래잡기를 할 때. 따스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밥상머리에 작은 새끼들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서로 더 먹겠다고 즐거운 아우성을 질러댈 때. 그리고 밤이 깊어 모두 다리를 내어 놓고 구름 같은 이불 아래 정답게 나란히 누워 있을 때, 어머니는 혹시 아홉 번째의 보이지 않는 빈자리를 세고 계셨던 것은 아닐까.


어머니의 눈빛에는 살아 있는 자식들만을 향하지 않았다. 먼저 떠난 아이에게도 닿아 있었던것이다. 어머니에게 자식이란 모두였고. 우린 각각 온마음을 다해 사랑받는 단 하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