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살 무렵, 부모님은 새로운 삶을 꿈꾸며 할머니 댁의 넉넉한 그늘을 벗어나 분가를 결정했다.
조부모님과 함께 살던 시절, 끼니 걱정은 그 시대 흔한 이웃집 이야기일 뿐이었다. 많은 논밭을 소유하고 있었던 할머니 댁 가마솥에서는 매일 아침 눈부시게 하얀 김을 내뿜는 쌀밥이 산처럼 쌓였고, 우리는 그 풍요로움을 마음껏 누렸다.
그러나 분가와 함께 마주한 밥상 위에서 그 눈부신 쌀밥은 자취를 감췄다. 밥그릇 속에는 쌀알보다 질경이와 취나물, 콩나물이 더 빽빽하게 엉켜 있었고, 그 곁에는 덩그러니 놓인 김치 한 사발이 찬의 전부였다. 다섯 살이 지나고 초등학교에 입학해서도 가난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고 , 자식들에게 거친 나물밥을 먹어야 했던 아버지는 차마 그 광경을 지켜볼 수 없었다.
아버지는 눈칫밥을 먹을지언정 자식들의 배만큼은 하얀 쌀밥으로 채워지길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방학만 되면 우리는 쫓기듯 할머니 댁으로 가야 했다. 처음에는 아버지와 함께 길을 나섰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아버지 대신 동생들의 고사리손을 꼭 쥔 채 길 위의 보호자가 되어 할머니댁을 방문해야 했다.
양양 광산에서 화일리를 거쳐 석교리, 그리고 중복리에 이르는 길은 어린 남매에게 세상 끝보다 멀고도 험난한 고행길이었다. 특히 석교리 어귀에 다다를 때면 심장이 목구멍까지 차올라 콩닥거리기 시작했다. 길목을 지키던 동네 아이들이 과자 나 돈을 내놓으라며 늑대처럼 으름장을 놓곤 했기 때문이다.
처음 그 아이들과 마주했던 날, 용감하게 맞서던 동생이 흠씬 두들겨 맞는 것으로 참혹한 통행세를 대신 치러야 했던 기억은 지금까지도 상처로 남아 있다. 그날 이후, 우리는 적진을 통과하는 패잔병들처럼 숨을 죽였다. 멀리서 아이들의 그림자만 보여도 담 뒤로 몸을 숨긴 채 동태를 살폈다. 기회가 왔다 싶으면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쏜살같이 달리고 또 달렸다.
방학마다 반복되던 그 절박한 숨바꼭질은 더 이상 할머니 댁으로 가고 싶지 않다는 열망이 되었고, 길에서 남자아이들을 만나거나 목소리만 들어도 온몸은 마치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한없이 작고 초라하게 쪼그라들었고, 오빠가 살아 있었다면 보호막이 되어 주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컸다.
그토록 험난한 길을 뚫고 도착한 할머니 댁에서 받을 수 있는 것은 넉넉한 밥상이었다. 할머니 댁은 우리 남매뿐만 아니라 외손주들까지 모두 찾아왔고, 항상 흰쌀밥은 가득했다. 그러나 흰쌀밥을 먹으며 배를 채우는 기쁨도 잠시, 여름방학은 어린 우리에게 감당하기 힘든 고역의 계절로 변해갔다.
할머니 댁의 여름은 결코 낭만적이지 않았다. 산더미처럼 쌓인 감자 더미 앞에 앉아 손끝이 아리도록 껍질을 까야하는 날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뙤약볕 아래서 제 몸집보다 커다란 소를 몰고 풀밭을 찾아 산등성이를 헤매기도 했다.
많은 농사를 지어야 했던 할머니는 손주들의 고사리 손도 빌리지 않으면 안 될 만큼 바빴다. 쌀밥밥에 고기반찬을 얻어먹는 대가는 결코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농사일은 어린 우리의 소소한 일상마저 집어삼켰고, 쉼 없이 가축을 돌보고 농사의 잔일을 해야 했다.
텃세를 부리는 아이들을 피해 전전긍긍하며 도착해야 했던 여정부터, 뙤약볕 아래 땀 흘려야 했던 노동까지, 여름방학은 흰쌀밥의 유혹은 없어지고 그저 버겁고 고달픈 계절일 뿐이었다.
그에 비하면 겨울방학은 우리에게 찾아온 허락된 천국이었다. 싸리나무로 정성껏 엮어 만든 덕석이 윗방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는데, 그 안에는 겨울을 나기 위한 보물 같은 고구마가 가득 쌓여 있었고, 장독단지에는 김장김치가 가득했고, 처마 끝에서는 곶감이 줄을 이어 말라가고 있었다.
출출한 밤이면 살얼음이 살짝 낀 시원한 동치미 국물에 하얀 국수를 말아먹었다. 그 알싸하고 개운한 맛은 여름날의 고생을 눈 녹듯 씻어내주었다.
낮이 되면 꽁꽁 얼어붙은 논바닥 위에서 썰매를 타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뛰어놀았다. 여름날의 소몰이와 감자 깎기가 '생존을 위한 노동'이었다면, 겨울날의 썰매 타기는 '오롯한 유년의 유희'였다.
찬 바람에 뺨이 발갛게 익어도 웃음이 끊이지 않던 그 겨울, 할머니 댁 윗방에서 풍겨 나오던 고구마의 단내와 동치미의 시원함은 부모님 곁을 떠나야 만 했던 현실을 잠시 잊게 해주는 가장 포근한 위로였다.
겨울방학이 주는 안온함에 푹 젖어 있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우리는 윗방 싸리나무 덕석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고구마를 꺼내 들었다. 갓 꺼낸 고구마의 흙 내음과 달큼한 향이 방 안 가득 번졌다.
방학이 끝날 무렵에나 우리를 데리러 오시던 아버지가 예고도 없이 방문을 열고 들어섰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랄 법도 했지만, 오랜만에 아들을 마주한 할머니는 서둘러 아랫목에 자리를 마련하고는 갓 지은 밥을 챙겨 들어오셨다. 따뜻한 밥그릇의 온기와 함께 모자(母子) 사이의 나지막한 대화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흙 묻은 고구마 껍질을 '퉤퉤'거리며 정성껏 깎아내고, 이제 막 그 달콤한 속살을 입으로 가져가려던 찰나였다. 갑자기 아랫방에서 평화로운 분위기를 찢는 고성이 터져 나왔다. 할머니와 아버지의 말다툼이었다. 베어 물었던 고구마를 내던지듯 내려놓고, 숨을 죽인 채 문틈으로 방 안의 동태를 살폈다.
아뿔싸
귀를 의심케 하는 말이 할머니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가 밥을 너무 많이 먹는다며 아버지에게 흉을 보고 계셨다. "외손주들은 적게 먹는데, 유독 네 자식 놈들은 어른보다 밥을 더 먹어치우니 원..."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 아버지는 들고 있던 숟가락을 밥상 위로 거칠게 내던지셨다. 쨍그랑거리는 쇳소리가 나기가 무섭게
"야! 얼른 옷 입어!"
아버지는 불같이 화를 내며 윗방의 우리를 향해 소리치셨다. 어안이 벙벙해 머뭇거리는 우리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아니, 빨리 입으라니까!"
시곗바늘은 이미 밤 11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 앞에서 걸어라."
하늘에는 두꺼운 회색 구름이 낮게 흐르고, 구름 틈바구니를 헤집고 나온 무심한 달빛만이 암회색 밤길을 비추고 있었다. 달 주변을 서성이던 구름이 사라지고 살을 에는 듯한 칼바람이 소매 끝을 비집고 들어와 온몸을 싸늘하게 얼려버렸다. 달도 하얗게 얼었다.
'아버지가 앞에서 걸으면 찬바람이라도 조금 막을 수 있는데...' 하는 마음에 슬그머니 걸음을 늦추어 아버지 뒤로 숨었다.
"어서 내 앞에서 걸어라"
"아버지, 걸음이 빨라 쫓기듯 가는 것 힘들어요. 게다가 바람을 온몸으로 다 맞아서 추워요."
동생의 투정 섞인 하소연에 아버지는 "아니다. 너희가 걷다가 엎어지기라도 하면 내가 바로 일으켜 줘야 한다."
우리는 중복리를 지나 강선리 둑길을 따라 7번 국도 정암리 초입으로 들어섰다. 뒤따르던 아버지의 묵직한 발자국 소리는 얼어붙은 둑길에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어느덧 파도 소리가 귓가를 때렸고, 어슴푸레한 수평선 위로 갈매기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밤의 수면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갈매기의 꽁무니를 쫓다 보니 할머니의 그 모진 말들이 떠올라 우울했다. 그 말이 그렇게 슬프고 아플 수가 없었다.
할머니….
내게 할머니는 어머니만큼이나 아름답고 고결한 존재였다. 가문의 기둥이자 모든 자식과 손주들이 우러러보는, 마치 범접할 수 없는 산 같은 분이셨다. 그런 분의 입에서 나온 말이 '자식들이 밥을 많이 먹어 흉이 된다'는 것이었다니.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분이 한순간에 낯설게 느껴지는 비참함은 살을 에는 바닷바람보다 더 시렸다.
고결한 줄만 알았던 할머니의 가슴 안쪽에는 자식의 입에 들어가는 밥알을 세는 궁색함이 들어 있었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가자."
그 짧은 한마디에 담긴 아버지의 마음을 나는 비로소 조금이나마 이해할수 있었다. 자식을 배불리 먹이려 당신의 자존심까지 할머니에게 맡겼으나, 정작 눈앞에서 밥벌레 취급을 받는 꼴을 그 어떤 아버지가 견딜 수 있었을까.
그 순간, 내 안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할머니 댁으로 향해야만 했던 원망이나 엄마 곁을 떠나야 한다는 슬픔이 아니었다.
한겨울 밤의 모진 바람을 함께 맞으며, 서로의 그림자를 밟고 걷는 이 길은 부모와 자식, 부녀간의 사랑이 이어진 길이었다. 우리는 부녀(父女)라는 질긴 고리로 단단하게 얽힌, 결코 끊어낼 수 없는 숙명처럼 이어진 부모와 자식사이였다.
차가운 7번 국도 위를 걷는 우리의 발걸음은 더 이상 쫓겨나는 패잔병의 것이 아니었다. 비록 나물 섞인 거친 밥일지언정, 서로의 자존을 지킬 수 있는 우리만의 집으로 향하는 당당한 행진이었다. 그 밤, 뒤에서 묵묵히 내 뒤를 지키던 아버지의 발소리는 세상 그 어떤 위로보다 크고 묵직하게 내 등 뒤를 감싸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