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양성당에서
1950년 6월, 한반도의 운명을 뒤흔든 6·25 전쟁이 발발했다. 전쟁 이전의 양양은 이미 북한의 통치 아래에 놓여 있었다.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38선을 경계로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주둔하면서 서로 다른 체제가 자리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비록 서로 다른 체제하에 놓여 있었다고는 하나, 당시 사람들의 일상은 논밭을 일구고 장에 나가며 이웃과 안부를 나누던 예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의 포성이 울리자 그 평온한 시간은 한순간에 산산이 부서졌다.
전선이 밀고 내려오면 북한군에 협력해야 했고, 다시 밀려 올라가면 남한군에 협조해야 하는, 하루아침에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하는 혼란과 두려움의 연속이었다. 끊임없이 밀고 밀리는 전황 속에서 마을의 풍경도 달라졌다. 집과 들녘, 골목길에는 아이들과 노인, 그리고 남겨진 여성들만이 있었고, 징집과 피난으로 떠난 남자들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웠다.
매년 마을에서는 마을의 평안과 무탈함을 기원하는 동네 제사가 성황당에서 열렸다. 이 제사는 오래전부터 내려온 엄격한 관습에 따라 음식 장만에서부터 제를 올리는 모든 절차는 오롯이 남자들의 몫이었다.
여자가 조금이라도 손을 보태거나 제사에 관여하면 ‘동티가 난다’ 하여 마을에 재앙이 닥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사를 앞둔 날이면 말과 행동을 더욱 삼가고, 조금의 부정이나 불결함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마을 사람들 모두 조심했다.
전쟁의 소용돌이 속이었지만 마을 제사만큼은 멈출 수 없었다. 포성이 멀리서 들려오고, 피난과 징집으로 마을이 텅 비어 가는 와중에도 어른들은 제사 준비로 걱정이었고, 감히 나서려고 하지 않았다.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의 마음에는 전쟁의 공포와는 또 다른 두려움이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더 큰 화가 오는 것 아닐까.” 하는 불안이었다.
그러나 정작 제사를 맡아야 할 남자들은 전쟁터로 떠났거나 행방이 묘연해, 마을에는 제를 주관할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제사는 지내야 했지만,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한 채 눈치만 보는 사이 시간만 흘러갔다. 바로 그 막막한 순간, 외할머니가 나서게 되었다. 할머니는 마을에서 가장 연세가 많은 어른이었고, ‘여자’라기보다 모두가 의지하는 한 사람의 어른이었고, 삶이 쌓아 올린 위엄과 신망, 팔십을 넘어서는 나이가 관습의 경계를 넘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남자만이 할 수 있다고 여겨졌던 동네 제사!! 아무도 나설 수 없던 그때, 할머니가 대신 맡아 준비하게 되었다. 마당에는 잡귀를 막는다는 금줄이 팽팽하게 둘러쳐졌다. 전쟁통이라 변변한 재료를 구하기 어려웠지만, 있는 것 안에서 정성을 다해 음식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외할머니는 과일을 맑은 물에 여러 번 씻어 가지런히 올리고, 얇은 부침개를 몇 장 부쳐 따뜻한 기운을 더했다. 여명이 트기 전 샘터에서 길어 온 차가운 물로 하얀 쌀밥을 짓기 시작했다. 아궁이의 불길이 잦아들고 솥뚜껑이 들썩이며 밥 짓는 김이 부엌 가득 퍼지기 시작하던 바로 그때였다.
느닷없이 안면도 없던 생판 모르는 아주머니가 금줄을 걷어 올리고 개를 데리고 부엌 안으로 들어섰다. 그 순간, 외할머니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제사 음식을 마련하는 자리에 여자가 드나드는 것조차 금기였고, 더구나 개는 부정을 가장 크게 타게 하는 존재로 인식되었다. 동티를 부른다고 믿던 두 가지 금기가 한꺼번에 부엌 안으로 들이닥친 셈이었다.
그 광경을 마주한 외할머니는 그 자리에 멍하니 굳어지고, 이내 넋이 나간 사람처럼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떨어뜨렸다. 그리고는 음식 준비를 더 이상 이어 가지 못한 채, 무언가에 쫓기듯 허둥지둥 움직이며 거의 넋두리하듯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전쟁의 공포와 오래된 금기가 한순간에 겹쳐지며, 부엌 안에서는 괴성을 지르는 광기가 시작되었다. 정신줄을 놓은 채 소리를 지르던 할머니가 결국 기절했다.
원산에서 부모님 곁을 떠나 할머니댁에 왔다가 전쟁 통에 돌아가지 못한 채 머물고 있던 손자에게는 그야말로 날벼락이었다. 할머니는 딸(우리 어머니)과 손주도 알아보지 못한 채 마을 이곳저곳을 헤집고 다녔고, 말리는 사람들에게 거칠고 위협적인 행동까지 서슴지 않았다.
손주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장정 못지않은 힘을 썼고, 간신히 방 안에 앉혀 놓아도 몸부림치듯 일어나려 했다. 그 기세를 도저히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날이 갈수록 그 증세는 더 심해져 위험인물이 되어갔다. 이를 지켜보던 이웃집 할머니가 조심스레 한 가지 방법을 내놓았다.
“저렇게 미신에 사로잡힌 사람은 교회에 가야 낫고 그 반대로 교회에 미친 사람은 신령님을 만나야 한다 ”는 것이었다. 막다른 상황에서 붙잡은 한 줄기 빛 같은 이야기였다. 손주는 양양 읍내에 있는 성당을 찾아갔다. 손주는 신부님에게 그동안의 사정을 차근차근 이야기했다. 말을 다 들은 신부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양양에서 삼십 분가량 떨어진 마을까지 직접 방문하시기로 했다.
신부님이 마을 어귀에 들어서자, 외할머니는 마치 무언가를 피해 숨듯 윗방으로 올라가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쓴 채 몸을 숨겼다. 신부님이 방문한다는 사실을 알리 없는 할머니의 행동에 이웃사람들 모두 놀랄 뿐이었다.
신부님이 방 안으로 들어와 기도를 하자 빼꼼히 얼굴을 내밀고 다시 이불속으로 숨어 들어가기를 반복하다가 신부님이 돌아가셔야 이불속에서 나왔다. 신부님은 일주일에 한 번 또는 두 번을 방문, 할머니를 위해 기도를 하셨다. 그러는 사이 할머니는 순한 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신부님의 방문은 한 달간 계속되었다.
한 달이 지나자 신부님은 성당으로 모실 것을 권했다. 성당으로 옮긴 지 석 달만에 할머니는 마치 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서서히 안정을 되찾았고, 마침내 제정신으로 돌아와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이 이야기를 어머니에게 들으며 자랐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일어났던 그 일을, 사람들은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 ‘종교의 힘’, 혹은 기적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성당만 보면 늘 외할머니와 어머니의 모습이 함께 떠오른다. 성당 문을 밀고 들어설 때마다,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조용히 올라온다. 그 감정은 기쁨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리움이라고 도 할 수 없는 묘한 감정이다. 포르투갈 여행 중 들렀던 파티마 성당에서는 그 감정이 유난히 크게 밀려와, 거의 이십 분 가까이 이유도 모른 채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성당과는 할머니와 인연이 있었지 나는 한 번도 성당을 가본 적도 없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울게 만드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지난달 양양성당을 꼭 가봐야 할 것 같은 느낌이 좀처럼 가시지 않아 방문했다. 오래된 건물의 벽과 마당, 조용한 성당에서 외할머니가 기도하는 모습으로 머물러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내가 성당에서 느끼는 감정은 신앙이라기보다 이어지는 가족애에 더 가까운 것일 수도 있다.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전쟁의 시간은 어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살아 있는 기억이 되었고, 외할머니의 삶과 그날의 일들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내 안에 깊이 각인되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 성당문을 밀고 들어가는 것은 신을 찾으러 가는 것이 아닐 가족이 있던 장소인지도 모르겠다. 외할머니가 무릎 꿇었을 자리, 어머니가 손을 모았을 자리를.
성당의 종소리가 들리거나, 여행 중 성당을 만나며 자연히 끌린다. 이끌림이 가족에 의한 것인지, 가족으로 인한 내 마음이 저절로 움직이는 것인지 아직은 잘 알지 못한다. 여행 중 성당을 더 적극적으로 방문, 마음의 실체를 알아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