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파란 물빛, 비취색보다 더 깊고 짙은 코발트블루를 머금은 속초 바다는 겨울에 더 진가를 드러낸다. 여름의 파도가 살금살금 다가온다면, 겨울바다는 한꺼번에 몰려왔다가 다시 밀려가며 숨 가쁜 리듬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바다는 겨울에 보아야 제맛이라고 믿는다.
수없이 부서지는 파도와 계절마다 달라지는 바다의 색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같은 바다인데도 매번 다른 얼굴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보는 자리와 시간, 햇빛의 각도에 따라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지는 걸 보면, 어쩌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또한 저 바다처럼 각자의 눈금과 잣대에 따라 달라지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여덟 남매도 꼭 그렇다. 얼핏 보면 바다처럼 서로 닮아 보이고, 특별히 튀는 구석 없이 비슷비슷해 구별이 안 갈 것 같지만, 조금만 들여다보면 전혀 다르다. 같은 부모 아래에서 태어났건만 성격은 닮은 데가 없고, 생각이 딱 맞아떨어지는 순간은 손에 꼽을 만큼 드물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그분들의 말 한마디에 의견이 조율되곤 했지만, 지금은 각자 제법 잘났다고 살아가고 나 역시 예외는 아니다. 나는 둘째라 은근히 왕초 노릇을 한다. 위로 언니가 한 명 있긴 하지만 일곱 살이나 차이가 나서 언니라기보다는 어른 같다. 괜히 덤볐다가는 혼쭐나기 십상이어서 늘 눈치만 살피곤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내가 동생들 사이에서 중심인 척을 한다.
그런 내게 가장 거침없이 맞서는 동생이 바로 후복이다. 언니라는 명목으로 눌러야 겨우 체면이 서는 존재랄까. 나와는 정반대 성격으로, ‘막무가내’라는 말이 딱 어울릴 만큼 씩씩하고 대담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 어머니가 길러 놓은 콩나물을 머리에 이고 나가 팔고 다닐 정도였으니 말 다 했다.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부러운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게다가 목소리도 크다.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다는 표현이 꼭 맞는다. 금방이라도 싸움을 벌일 것 같은 우렁찬 음성 앞에서 나는 괜히 기가 눌려 “제발 좀 다정하게 말해 봐” 하고 핀잔을 주곤 한다.
얼마 전 그 동생이 집에 놀러 왔다. 마침 지인이 함께 있어 자연스레 동석하게 되었고, 나는 동생을 소개하며 이름이 후복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지인은 이름이 참 특이하다며, 혹시 놀림을 받은 적은 없느냐고 물었다.
동생은 웃으며 얼마 전 취업 면접에서도 같은 질문을 받았다고 했다. 그리고는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난 이 이름 좋은데? 한번 들으면 사람들이 절대 안 잊어버리잖아. 그리고 얼마나 의미 있어. 나중에 복이 들어온다는 거잖아. 젊어서 복 많은 것보다 나이 들어서 복 많은 게 더 좋지 않나? 난 이름 때문에 행복하다고 생각해. 정말 생각만 해도 행복한 이름 같아.”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사실 후복이라는 이름이 붙게 된 데에는 나도 한몫했는데, 정작 당사자는 저토록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에 의미를 부여하다니 놀랍기만 했다. 나는 여전히 이름을 말 할 때마다 어딘가 모르게 머뭇거리는데 말이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지간히도 미웠는지 그 원인을 외탁해서 그렇다고 조부모님이 석 달 동안이나 이름을 짓지 않으셨다고 한다. 이름이 지어지기 전까지 나는 ‘해님이’라는 별명으로 불렸고, 어느 날 이웃집에 다녀온 고모가 “못난이한테 딱 맞는 이름 하나 주워 왔다”며 붙여 준 것이 지금의 내 이름이다.
위의 언니는 ‘숙’ 자 돌림으로 당시에는 꽤 예쁜 이름을 가졌는데, 나를 기점으로 집안의 돌림자가 ‘복’ 자로 바뀌어 버렸다.
순복
후복
일복
정복 등등
그 이야기를 들은 뒤부터 나는 내 이름이 싫어졌고, 나 때문에 동생들까지 덩달아 예쁜 이름을 갖지 못했다는 생각에 괜한 죄책감까지 품게 되었다. 아버지 역시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셨던 모양이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작명가가 좋다는 이름 열 가지 이상을 갖게 되었으니까.
개명이 쉽지 않던 시절이라 결국 호적에는 그대로 남았고, 그렇게 나는 이 이름으로 살아오고 있다. 그런데 동생은 달랐다. 자신의 이름에 자부심을 갖고 있었고, 심지어 미래의 복까지 걸고 있었다. 그 당당함 앞에서 언니 노릇하며 잘난 체하던 내가 오히려 한방 먹은 기분이었다.
나는 지금껏 이름 탓을 하며 스스로 움츠려 온 것이 부끄러워졌다. 같은 이름의 무게를 안고 살아도 누군 그것을 짐으로 삼고, 누군가는 축복으로 바꾼다는 사실을 내 동생 후복이는 알고 있었다.
바다도 그렇다. 날마다 다른 빛과 색으로 출렁이지만, 자세히 바라보지 않으면 그저 ‘바다’로만 보이는 풍경.
사람의 이름도 그렇지 않을까.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저 불리는 소리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스스로 생명력을 불어넣는 순간 그것은 삶의 방향이 되고, 마음의 깃발이 된다.
이제 더 이상 이름 때문에 움츠러들지 않기로 했다. 내 동생 후복이처럼, 주어진 이름을 탓하기보다 그 안에 어떤 시간을 채워 갈지를 스스로 선택하며 살기로 했다. 훗날 내 삶을 돌아보았을 때, 그 이름이 부끄러움의 흔적이 아니라 긍정과 희망의 증거로 남아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조금 더 욕심을 내자면, 나를 부르는 그 두 글자가 배려와 따뜻함을 떠올리게 하는 상징이 되도록, 하루하루를 정성껏 채워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