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대면하라

-월경이라는 경전-22-

by 간서치 N 전기수

말하자면 몸은 사망의 처소입니다. 우리 모든 사람들의 몸에는 사망과 부패의 본질이 있습니다. 그리고 부패 과정이 점점 증가하고 자라나고 있는 것입니다. 타락한 이래 즉 언제나 우리가 이 세상에 나와 살아가기 시작하는 순간에 우리는 역시 죽어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첫 번째 호흡은 언젠가 거두어지게 될 것 가운데 하나입니다. 타락의 결과 사람의 위치는 그러합니다. 우리 모든 사람 속에 사망이 이르고 부패케 하는 본질이 있습니다. 타락의 결과로 사람의 몸은 연약과 비천과 죽음의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사람의 몸은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할 때는 생명과 탄력으로 충만한 몸이었습니다. 타락하고 나서부터 우리는 질병과 연약과 부패와 죽음의 씨앗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우리가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죽어가기 시작합니다! 부패의 과정은 어떤 나이가 지나서 명백히 드러납니다. 사람이 25세 될 때까지는 발전할 수 있는 최대한으로 발전합니다. 그러나 그 다음부터 부패의 요소는 더욱더 분명하게 나타나게 됩니다.


프로이트는 우리가 그 존재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 본능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뉜다고 한다. 하나는 에로스적 본능으로서 언제나 살아 있는 물질을 더 큰 단위로 뭉치게 하려는 것이며, 또 하나는 죽음의 본능으로서 이러한 생명 추구에 맞서면서 살아 있는 것을 비유기적 상태로 되돌리려는 것이다. 두 가지 본능의 이러한 통합 작용과 대립 작용으로 말미암아 생명 현상들이 생겨나고 또 죽음은 그것을 종식시킨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죽음에 대한 철학적 ‧ 종교적 정의가 아니다. 두 개의 근원적 본능을 인식하고 그 각각에 고유한 목표를 인정해 주려는 것이다.


죽음은 항상 거기 있었던 텅 빈 진공을 드러내 보여줄 뿐이며 우리가 살아 있다고 부르는 사람들은 아직 가면을 벗지 않았을 따름이다. 모두들 파산 상태에 이르렀지만 어떤 이들은 아직 선고를 받지 않았을 뿐이다.

“죽음은 없다”라든가 “죽음은 중요한 게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참아내기란 어렵다 죽음은 있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발생하는 무슨 일이건 결과가 있게 마련이며, 그 일과 결과는 회복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다. 차라리 탄생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편이 더 낫겠다.


영국의 문학가 C. S 루이스는 느즈막한 나이에 한 여인을 만나 결혼을 하였다. 그 때에 이미 그의 아내는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상태였는데도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오래 지 않아 죽었고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헤아려 본 슬픔』이라는 책을 남겼다. 그 책에 아내를 보내고 경험한 그의 심정을 담아 놓았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사람들에게 나는 계면쩍음을 넘어서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죽음의 상징이다. 행복한 부부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그들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우리들 중 하나는 언젠가 저 사람처럼 되겠구나!’(p28).


오늘 우리가 헛되이 보낸 시간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었지만, 오늘 우리가 들이 쉬고 내쉰 숨은 우리가 죽는 날에 호흡할 들숨과 날숨에 포함되어 있다. 과거 그리스 연극에서는 배우들이 가면(Persona)을 쓰고 극중 인물을 연기하였다. 우리는 아직 산 사람의 가면을 쓰고 살고 있지만, 언젠가 이 가면을 벗을 날이 오게 된다. 이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우리는 죽음 견디지 못해 한다. 아내를 보낸 홀아비에게서도 부담감을 느끼고, 집근처에 납골당이 들어오는 것을 온 동네가 들고 일어나 반대한다. 그들의 재산권에는 아무런 영향이 끼치기는커녕 도리어 상승효과를 가져온다는 수치가 있는데도 여러 이유를 들어 반대한다. 죽음은 이처럼 산사람을 힘들게 하는 암 세포와 같다.


스캇 펙이 그의 저서에서 인생은 고해라고 말할 때에 그 모든 고해의 종지부는 죽음일 것이다. 그는 문제를 피하지 말고 대면하라고 가르치고 있고, 그리할 때에 성장을 가져오고 고통을 경감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고 연애 다음에 결혼이 오듯이 결혼 다음에는 자연스럽게 죽음이 온다. 그것은 과정의 단절이 아니라 그 여러 단계들 중의 하나이다. 춤이 중단된게 아니라 그 다음 표현 양식으로 옮겨 간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연인 덕분에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난다’ 그 다음에는 춤의 비극적인 양식에 따라 우리는 여전히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비록 그 육신의 존재는 사라지고 없어도 연인 그 자체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며, 우리의 과거와 추억, 슬픔 혹은 슬픔으로부터의 위안, 자신의 사랑 따위를 사랑하느라 안주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죽음도 우리 삶의 한 부분이다. 삶이라는 것은 죽음이 있을 때에 가치가 있고 존재가 가능하다. 호스티스 운동의 창시자 엘리자베스 퀴블러스 로스 박사는 죽기 전에 그녀의 제자와 함께 저술한 『인생수업』이라는 책으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었다. 그녀는 의사로써 죽음을 앞둔 많은 시한부 인생들을 접하였고 그들의 이야기와 그들을 대함으로 얻은 통찰을 그 책에 담았었다.


그리스 밀레토스 학파 중에 한 사람인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런 말을 했다. “질병은 즐겁고 좋은 건강을 만들어주며, 배고픔은 배부름을, 피곤함은 휴식을 가져다준다.” 이 말의 뜻은 이런 것이다. 쾌적함은 그 반대의 상태가 잠재해 있기에 가능하다. 지금 누리는 행복과 아름다움의 배경에 항상 그 반대 상태가 깃들어있다. 지금 당장 드러나 있는 상태는 이 배경에 대항해서 자신의 존재를 주장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의 찰나 동안만 가능할 따름이다. 그래서 젊음은 조금씩 늙어가는 과정이다. 모든 아름다운 것, 누릴 만한 것, 훌륭한 것, 충만한 것은 필연적으로 내재한 반대 상태를 대가로 치르고 얻었으므로, 언젠가는 반대 상태에 굴복해서 멸망하게 되어 있다. 삶 전체는 끊임없이 어디에서나 변화를 경험하는 것으로 이루어져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는 현존재와 세계가 지금 어떤 지배적인 상태에 놓여 있는지를 틀 짓는 테두리를 넘어서서 생각할 수 없다는 듯이 행동한다. 우리들을 불쾌하게 하는 것들을 덮어 둔 채, 그런 것들은 없었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에 반해서 헤라클레이토스는 지금 존재하지 않는 모든 상태는, 존재하는 반대 상태 안에 함께 숨어 있으며 결코 무(無)가 아니라는 통찰을 제시한다. 살아있음 자체에 이미 죽음이 기다리고 있고, 낮에 대해서는 밤이 기다리고 있다. 로고스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지배적인 상태는 짧든지 길든지 간에 어떤 시간의 경과가 있은 뒤에는 잠재해 있던 반대 상태로 반드시 전환된다. 파르메니데스도 존재에 대해서 그와 비슷하게 보았다. 현존하지 않는 것은 숨겨진 채로 함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볼 줄 아는 능력을 가리켜 파르메니데스는 '지성(Geist)'이라고 부른다.


세계 법칙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이 소멸하도록 운명 짓고, 재앙을 가져오는 것도 일정 기간만 지속하게 한다. 좋은 것으로의 선회 역시 불가피하다. 세계 법칙은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삶은 이러한 규칙에 따라 진행되고 시간이라는 심판관에 의해 관철된다. 근본적으로 질서가 세계를 지배하고,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변화는 깊은 의미가 있다.


살아있음 자체에 이미 죽음이 기다리고 있고, 낮에 대해서는 밤이 기다리고 있듯이. 로고스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지배적인 상태는 짧든지 길든지 간에 어떤 시간의 경과가 있은 뒤에는 잠재해 있던 반대 상태로 반드시 전환된다. 이것이 변증법의 원리이다. 삶 전체는 끊임없이 어디에서나 변화를 경험하는 것으로 구성된다.


현대인의 이와 같이 좋은 쪽만 추구하려는 경향을 클라우스 헬트는 “상태를 터무니없이 지속하려는 경향”이라고 말했다. 인간은 지속성이라는 헛것으로 자신을 둘러싸면서 삶을 견뎌낸다. 그런 까닭에 인간은 플라톤 이래로 불변과 영원의 왕국인 이데아의 왕국을 지어냈다. 그러나 영원하고 지속적이라고 일컫는 모든 것, 좋음과 아름다움 자체αὐτὸ τὸ καλὁν, 신, 도덕적 규범 같은 것들은 모두 자기 보존을 위하여 삶이 만들어낸 조건일 따름이다.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고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세계 법칙은 행복을 가져다주는 모든 것이 소멸하도록 운명 짓고, 재앙을 가져오는 것도 일정 기간만 지속하게 한다. 좋은 것으로의 선회 역시 불가피하다. 세계 법칙은 더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삶은 이러한 규칙에 따라 진행되고 시간이라는 심판관에 의해 관철된다. 근본적으로 질서가 세계를 지배하고, 우리 삶을 불행하게 만드는 모든 변화는 깊은 의미가 있다.


삶의 모든 상황에서, 평범하고 일상적인 일들을 넘어서는 매우 강력한 것을 경험할 때, 고대 그리스인들은 그것을 ‘신적인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런데 이처럼 매우 강력한 신적인 것이 인간에게 영향을 미칠 때 사람인 무력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무력함 속에서 신적인 것이 개입할 여지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적인 것은, 바로 극도로 무력한 인간이 존재 조건의 주인이 아니라,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서 근거를 갖는다. 그런 까닭에 그리스 사람들은 인간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원래 ‘죽어야 하는 존재(독일어로 'die Sterblichen', 그리스어로 ’thnetoi')'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이런 운명 때문에 언제 닥칠지 모를 죽음이라는 어두운 배경 앞에 스스로를 세워야만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서문강 역, 『로마서 강해』,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

프로이트, 임홍빈 ‧ 홍혜경 역, 『새로운 정신 분석 강의』. 열린 책들. 2003

C. S 루이스, 강유나 역, 『헤아려 본 슬픔』, 홍성사, 2004,

클라우스 헬트, 이강서 역, 『지중해 철학; Treffpunkt Platon』, 효형출판,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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