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시라소니 이성순

[이야기] 피와 눈물의 주먹전설

by 최경식

어릴 때는 철없게도 누가 싸움을 잘하는지에 관심이 많았다. 놀이터에서도 그랬고 학교에서도 그랬다. 고등학교 때는 드라마 <야인시대>가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싸움과 싸움꾼들에 대한 관심도는 더욱 높아졌다. (그렇다고 샛길로 빠졌다거나 학습을 등한시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본인이 가장 크게 관심을 가졌던 싸움꾼이 있었으니, 바로 시라소니 '이성순'이었다.


한국 사람들이라면 대부분이 들어봤을 법한 이름이다. 북한은 물론 중국으로 넘어가 강자들을 모조리 때려눕혔고, 일본 야쿠자들과 40대 1로 싸워 승리하기도 했다. 40대 1은 믿을 수 없게도 신문 기사에도 실렸다. 해방 후에 남한으로 와서는 주먹황제로 불렸던 김두한까지 무릎 꿇렸다. 유명한 주먹 조직이었던 동대문 사단의 핵심멤버 유지광은 시라소니가 동양 최고의 주먹이었으며, 그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고 단언했다.


도대체 싸움 실력이 어느 정도였길래 이런 이야기가 나왔는지 궁금했다. 우연한 기회에 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에 따르면 우선 시라소니의 게슴츠레한 눈빛은 굉장히 위압적이었다. 싸우기 전에는 대개 검은 장갑을 꼈다. 그리고 시라소니의 싸움 실력은 한마디로 '화려함의 극치'였다고 한다. 문학적인 과장을 다소 보탠다면, 한 번 움직이면 다섯 개의 꽃잎이 그려졌다는 오화전신(五花纏身)의 경지에 올랐었다고. 신체의 돌출 부위를 모두 활용한 타격기의 대가였으며, 전매특허인 공중걸이 박치기는 상대방을 단숨에 제압하는 무소불위의 기술이었다. 그 당시 시라소니의 싸움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열혈팬이 됐으며, 심지어 시라소니가 자주 오는 장소에서 기다릴 정도였다고 한다. 밤의 대통령이었던 임화수가 대표적이다.


시라소니의 흑역사라고 할 수 있는 '동대문 집단린치 사건'도 어찌 보면 그가 정말 대단했다는 방증이 된다. 이정재의 동대문 사단에게 있어, 시라소니는 그야말로 눈엣가시였다. 혈혈단신으로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지원을 요청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대문 사단은 시라소니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천하의 시라소니를 제거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에 특정 장소로 유인한 뒤 집단으로 공격하기로 했다. 동대문 사단의 최정예로 여겨지는 싸움꾼 여러 명이 시라소니 1명에게 달려들었다는 것은, 이미 그를 사람이 아닌 '맹수'로 인식했다는 뜻이 된다. 시라소니는 함정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수십 명을 때려눕히며 발군의 능력을 과시했다. 이대로 간다면, 또 하나의 '전설'을 남길 수도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다리가 전선줄에 걸려 넘어지면서 시라소니는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비록 이 사건은 안 좋은 결말로 귀결됐지만, 역설적으로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시라소니의 싸움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고스란히 증언했다.


어렸을 때에는 이처럼 시라소니의 단순 싸움 실력에 관심을 가졌다면, 나이를 먹은 뒤에는 시라소니라는 '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졌다. 여러 가지 흥미로운 부분들이 눈에 띄었다. 우선 시라소니는 흔히 말하는 조폭이 아니었다. 조직을 형성하지 않고 홀로 다녔으며, 약자들이 아닌 강자들만을 골라 상대했다. 약자들을 괴롭히기는커녕, 자신의 믿기지 않는 싸움 실력을 약자들을 도와주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이른바 '협객'적인 면모가 상당했던 것이다. 또한 강자였다고 해도 그가 등을 보인다면 절대로 공격하지 않았다. 나름의 정정당당한 싸움 철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시라소니는 가족을 끔찍이 아끼는 가정적인 사내였다. 특별히 아내를 사랑해서 그녀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수용했다고 한다.


본인이 크게 감명을 받았던 부분은 시라소니의 용서와 신앙이었다. 그는 린치 사건을 겪은 뒤 주먹 세계를 떠나 기독교에 귀의했다. 하나님을 마음으로 받아들이면서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다.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성경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하기도 했다. 추후 린치 사건과 관련해 동대문 사단의 두목이었던 이정재와 조사실에서 대면했을 때, 시라소니는 "이 사람에게 당한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정재에게 신앙을 가질 것을 권면했다. 이 말을 들은 이정재는 말없이 눈물을 흘리며 참회했다고 한다.


시라소니는 말년에 영락교회 집사로 지내며 신앙생활에 전념했다. 비록 2칸짜리 셋방에서 살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삶을 누린 것으로 전해진다. 죽기 직전에는 아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인생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오로지 하나님의 사랑만이 진실하다." 세상을 떠난 뒤 그가 남긴 것은 작은 성경책과 사진첩이 전부였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막내아들인 이의현도 목사의 길을 걸었다.


가끔씩 우스갯소리로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만나보고 싶은 역사적 인물들'을 거론하곤 한다. 여러 인물들 중에 시라소니 이성순도 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만큼 본인은 이 인물의 전설적인 싸움 실력은 물론 드라마틱한 인생사와 신앙에 공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느끼는 게 어디 본인뿐이겠는가. 한 시대를 풍미했던 진정한 상남자는 여러 사람들의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무를 것으로 보인다.

keyword
최경식 인문・교양 분야 크리에이터 직업 기자 프로필
구독자 2,876
작가의 이전글미국인들이 기억해야 할 '두 인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