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수양이라면 어땠을까?

[이야기] 만약의 역사

by 최경식

가끔씩 그런 상상을 해본다. 자신을 과거에 존재했던 인물에 대입시켜 보는 것이다. 그 시대에 그 인물로 살아간다면, 본인은 어떠한 생각과 행동을 했을까? 여러 인물들 가운데 본인은 수양에게 주목한다. 이것은 <왕과 사는 남자>의 흥행 때문만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생각해 왔던 것이다.


본인을 비롯해 수많은 사람들은 수양을 마치 '공공의 적'인 양 비난하고 있다. 분명히 수양은 가혹한 비난을 받을 만한 짓을 했다.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찬탈했고, 수많은 충신을 도륙했으며, 정통성 있는 어린 왕마저 비참한 죽음에 이르게 했다. 어떠한 명분을 들이민다 해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패륜적 범죄로 여겨진다. 이에 따라 수양에 대한 비난은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시대 상황 속에서 '본인이 수양이었다면 어땠을지'를 상상하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달라질 수 있다. 수양을 겨냥해 비난만을 할 수는 없게 되는 것이다. 되레 수양의 입장에 공감하면서, 그의 행위를 애써 정당화하는 단계로까지 나아갈 수도 있다.


■쿠데타에 대한 상상

본인(수양)의 능력은 남부럽지 않게 출중하다. 하지만 적장자 승계 원칙을 내세우는 조선 사회에서 절대로 보위에 오를 수 없었다.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인 세종은 이를 안타깝게 여겨 본인에게도 어느 정도의 역할을 맡겼었다. 본인은 자신의 처지를 개탄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용상에 대한 갈망이 있었다. 왕위에 오르면 국정을 잘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던 중 정국 급변 상황이 발생했다. 친형인 문종이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문종의 뒤를 이은 단종은 나이가 너무 어렸다. 더욱이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들은 '황표정사'를 통해 왕권을 유린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대로 가다간 태조 대왕이 힘들게 세운 나라가 위기에 처할 것 같았다. 또한 본인을 견제하는 고명대신들이 언제든 공격을 가할 수도 있었다. 이씨 왕조를 지키고 본인의 안위를 보호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바로 '정난'(靖難)이었다. 이것은 결단코 쿠데타가 아니다. 위태로운 상황을 평정하는 것이다.


■단종의 죽음에 대한 상상

본인은 진심으로 보위에 오르고 싶었다. 단종의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면서 선위를 압박했다. 이는 성공해서 꿈에 그리던 용상에 앉았다. 어린 조카가 안쓰럽기도 했지만, 사직을 지키기 위해선 불가피했다. 조카는 상왕으로 앉히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 집권의 정통성이 워낙 부족하다 보니 언제나 불안정한 느낌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 유응부)이 '단종 복위 운동'을 일으켰다. 운 좋게 이들의 역모를 밝혀내 처단했다. 사육신의 입에서 단종이 연루된 사실이 확인된 이상, 더 이상 조카를 상왕에 있게 할 수는 없었다. 결국 노산군으로 강봉한 뒤, 저 멀리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백성들은 조카의 보위를 빼앗은 데 이어 충신들의 목숨까지 앗아갔다며 본인을 맹비난했다. 나아가 친동생인 금성대군이 제2차 단종 복위 운동까지 일으켰다. 모든 화의 근원은 조카에게 있었다. 조카가 살아있는 한, 본인의 정통성 시비는 계속 불거질 것이고 역모는 끊이지 않을 터였다. 특단의 대책이 필요했다. 바로 '노산군을 죽이는 것'이었다.


이왕 죽이기로 결심했으면, 피도 눈물도 없이 단호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본인이 또 난관에 빠질 수 있다. 사람을 보내 노산군에게 사약을 내렸고, 그 시신을 결코 수습하지 말라고 엄명했다. 수습할 경우 3족을 멸할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노산군을 대역죄인으로 낙인찍음과 동시에 본인이 숨 쉴 틈을 마련하고자 했다. 그래야 살 수 있었다. 권력이란 게 원래 그런 것이다. 내가 죽거나, 아니면 상대가 죽는다.


■인간 본성과 올바른 도리

지금껏 쓴 글은 색다른 관점을 기반으로 했다. 상술했듯 본인을 수양에게 대입시켜 보았다. 본인도 그 당시 수양의 입장이었다면, 그랬을 수도 있겠다는 공감이 든 게 사실이다. 이는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성'에 기인하는 모습이다. 권력을 추구하고 자신의 안위를 보전하려는 인간 본성 말이다.


하지만 사람은 본성만으로는 살 수 없다. 사람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일 수 있는 이유는, 원초적 본성을 억제하고 '올바른 도리'를 추구하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그 당시 수양이 이와 같은 모습을 지향했다면,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도리가 아닌 본성에 집착한 결과, 비극적인 역사가 발생했으며 수양은 역사에서 영원히 지탄받게 됐다. <왕과 사는 남자>를 통해 널리 알려진 단종과 수양의 역사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떠한 가치를 추구해야 하는지를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태종과 세조는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