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두 냉혈군주의 차이점
영화 <왕과 사는 남자>로 인해 세조가 큰 관심을 받고 있다. 사실 이 왕은 이전부터 수많은 드라마와 영화를 통해 조명받은 적이 있다. 특히 <관상>이란 영화에서 이정재 배우가 세조(수양)를 적나라하게 묘사해 큰 인상을 남겼다. 세조에 대한 대중의 관심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세간에서는 세조를 태종과 자주 비교하기도 한다. 우리가 세조만큼 많이 접해본 이방원과 말이다. 그럴 만도 하다. 태종과 세조의 집권과정 및 성격 등이 매우 유사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쿠데타의 명분 차이
태종은 '제1차 왕자의 난'(무인정사)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세조는 '계유정난'을 통해 권력을 잡았다. 이 사건들은 말 그대로 쿠데타였다. 태종은 아버지인 태조 이성계에게 반기를 들었고, 세조는 고명대신들에게 반기를 들었다. 겉으로 보기에 두 사건은 비슷해 보이지만, 명분적 측면에서 차이가 컸다.
태종의 쿠데타는 대부분이 공감할 만한 명분을 갖췄다. 그는 조선 건국 과정에서 다른 왕자들에 비해 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무엇보다 조선 건국을 반대하는 이성계의 정적들을 앞장서 제거했다. 대신인 조준의 논리라면, 태종이 왕이 돼야 마땅했다. 조준은 "평시에는 적장자가 왕이 돼야 하지만, 난세에는 공이 많은 왕자가 왕이 돼야 한다"라고 말했다. 더욱이 무인의 집안에서 과거에 급제할 만큼 두뇌가 뛰어났고, 주변을 휘어잡는 강력한 카리스마까지 갖추고 있었다.
그럼에도 태종에게 세자 자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왕자에게 갔다. 적장자(이방우)도 아닌 가장 막내인 이방석이 세자가 됐다. 이것은 철저히 이성계와 신덕왕후 강씨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다. 사실상 이성계는 공적인 군왕의 입장이 아닌 '사감'에 기반해 차기를 선택한 셈이었다. 이방석은 나이가 어렸고, 총애하는 강씨의 자식이었기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다. 반면 이방원은 정몽주를 척살했다는 이유 등으로 미워했다.
나아가 이성계는 이방원과 그 동복형제들의 사병까지 혁파하려 했다. 손발을 자름으로써 이방석에게 힘을 실어주려 했다. 자연스레 이방원과 동복형제들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왕자의 난'은 예정된 수순이나 다름없었다.
태종과 달리 세조의 쿠데타는 명분이 현저히 부족했다. 이미 '적장자의 적장자'라는 완벽한 정통성을 갖춘 군왕(단종)이 보위에 있었다. 마땅히 세조는 정치 일선을 떠나거나 조카를 도와야만 했다. 아울러 당시에는 조선 초기처럼 과도기도 아니었다. 세종과 문종의 태평성대를 거치면서, 조선이란 나라는 안정기에 접어든 상태였다. 그대로 흘러갔으면 됐다. 그러나 세조는 순리를 거스르고 명분 없는 반란을 일으키고 말았다.
■숙청의 성격 차이
태종은 집권기에 '외척 숙청'이라는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 부인인 원경왕후 민씨 집안을 박살 냈다. 민씨의 동생들이자 자신의 처남들인 민무구, 민무질, 민무휼, 민무회를 모조리 죽였다. 세종의 장인인 심온도 처단했다. 이렇게만 보면, 처가와 며느리 집안을 박살 낸 냉혈한으로 보인다.
다만 태종의 숙청을 마냥 비판할 수만은 없는 측면도 있다. 이것이 세종의 태평성대를 여는 데 크게 일조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기세등등한 외척이 존재했다면, 아버지에 비해 미약했던 세종은 이들에게 휘둘렸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실제로 민무구, 민무질 등은 혈기왕성했고 무시 못할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태종이 사전에 '악업'을 짊어졌기 때문에, 세종은 안정적인 바탕 위에서 위대한 국정을 수행할 수 있었다.
또한 태종의 숙청은 철저히 정치적 계산에 따라 (비교적) 최소한으로 이뤄졌다. 막무가내로 제거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으로 제거할 필요성이 있는 대상만을 골라 숙청했던 것이다. 이른바 '정밀 숙청'이다. 이에 따라 태종의 숙청 규모는 다른 군왕들에 비해 크지 않았으며, 일정 정도의 명분도 갖췄다고 볼 수 있다.
세조의 숙청은 달랐다. 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세종의 태평성대를 구현하는 데 일조했던 인재 및 충신을 대거 죽였고, 같은 배에서 출생한 동복형제들(안평, 금성대군)의 목숨까지 빼앗았다. 급기야 확고한 정통성을 갖춘 선왕마저 죽임으로써, 조선의 유교적 헌정질서를 무너뜨렸다. 이것은 그 어떠한 명분으로도 정당화될 수 없는 패륜적 범죄였다.
■후속 전개과정의 차이
상술했듯 태종 이후에는 세종의 태평성대가 열렸다. 태종의 가혹한 조치들(외척과 공신 숙청)은 세종이라는 위대한 군왕으로 말미암아 정당성을 얻었다. 결과론적인 측면에서 살펴보면, 세종이 태종을 역사에서 구원한 셈이었다. 반면 세조 이후에는 공신들의 득세가 두드러졌다. 그는 부족한 정통성을 의식해 공신들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때부터 온갖 특혜와 과한 권력을 누리는 공신 세력이 조선 사회에서 일반화됐다. 이는 추후에 왕권 약화와 국정 혼란을 초래하는 원인이 됐다.
여러가지 측면을 감안할 때, 태종과 세조를 동일선상에서 보는 것은 잘못이다. 두 군왕의 본질은 명백히 다르다. 또한 태종이 세조보다 훨씬 우호적인 평가를 받아야 한다. 그들이 행했던 세세한 행위들의 차이점을 폭넓게 분석해 구분 짓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역사 인물과 사건을 다면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올바른 역사적 판단을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러한 태도가 정착될 때, 비로소 우리의 역사의식은 크게 성장하고 역사학도 발전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메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