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수양과 전두환
'역사의 평행이론'이라는 말이 있다. 과거의 역사가 현재에 유사하게 반복된다는 것이다. 이에 해당하는 여러 가지 역사들이 있다. 이 가운데 수양과 전두환의 평행이론이 주목된다. 두 사람은 개인적 성품이나 역사적 배경 등이 상당히 닮아있다. 이들을 통해 역사를 입체적으로 살펴보는 것은, 단순한 흥미를 넘어 역사 지식을 효율적으로 습득하는 유용한 도구가 된다. 과연 어떠한 측면들이 두 사람 간 역사의 평행이론을 형성하게 했는지 살펴보겠다.
■정점이 될 수 없었던 사람들
애당초 수양은 권력의 정점에 올라설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수양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었다. 적장자 승계 원칙에 따라, 근본적으로 차기 대권에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형이었던 문종이 워낙 뛰어나서 감히 왕위를 넘볼 수도 없었다. 수양 역시 뛰어난 존재였지만, 문종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문종은 문무를 겸비했으며, 다방면에 통달한 것으로 전해진다. 세종의 치세 마지막 7년 정도는 사실상 문종의 치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세종 말기에는 문종이 대신 정사를 잘 돌보며 국가와 백성을 안정시켰다. 전분 6등, 연분 9등의 전세법 제정과 훈민정음 반포 등도 문종의 손길이 미친 치적들이었다. 이처럼 엄청난 존재 앞에서 수양은 그저 가려진 존재에 불과했다.
전두환도 수양과 마찬가지로 결코 정점이 될 수 없는 처지였다. 비록 박정희의 총애를 받았다곤 하나, 일개 별 두 개짜리 소장에 불과했다. 전두환 위로 수많은 선배 군인들이 있었고,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여겨지는 유력 정치인들도 한둘이 아니었다. 권력 구조상, 전두환은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정점의 위치에 올라설 수 없었다. 그래서 비정상적인 방법을 시행하게 된다.
■갑작스레 발생한 권력 공백
조선은 세종 대에 이르러 반석 위에 올라섰다. 그를 빼닮은 문종이 즉위하면서 조선은 더욱 발전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문종은 오래 살지 못했다. 재위 2년 3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세자 시절부터 괴롭혔던 등창이 악화된 탓이다. 문종의 아들인 단종이 즉위했지만, 너무 어렸고 정치적 기반도 취약했다. 나이가 12세에 불과했으며, 수렴청정을 할 대비도 없었다. 순식간에 권력 공백상태가 발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틈타 수양이 숨겨왔던 발톱을 드러내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박정희는 무려 18년 간 절대권력을 행사했다. 강력한 권력 기관을 지렛대로 삼아 오랫동안 집권하다 보니, 박정희가 없는 세상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런 그가 1979년 10월에 갑자기 사망했다. 중앙정보부장인 김재규가 쏜 총탄에 유명을 달리했다. '10.26 사태'였다. 이때 국가 서열 1위만 사라진 게 아니었다. 사실상 이인자였던 차지철 경호실장도 사라졌다. 김재규도 보안사로 끌려가면서, 대한민국은 권력 공백상태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어려웠던 쿠데타, 극적인 성공
수양의 '계유정난'은 성공하기 어려운 쿠데타였다. 단종의 힘은 미약했지만, 그를 보필하는 역할을 맡은 대신(고명대신)들의 힘이 강했다. 대표적으로 백두산 호랑이 김종서와 영의정 황보인 등이 있었다. 이들이 공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만큼, 마음만 먹으면 정적인 수양을 제거하는 것이 가능했다. 실제로 대신들은 수양을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하고 견제했다. 대신들 뿐만 아니라 수양의 친동생인 안평도 수양을 견제했다. 수양은 매우 위태로운 처지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최종 승리는 수양에게 돌아갔다. 대신들이 수양을 제거할 타이밍을 놓쳐버린 게 결정적이었다. 잠재적 위협으로 인식했을 때, 단종을 빠르게 설득한 뒤 저 멀리 유배를 보냈어야 했다. 아울러 수양의 수족들을 단호하게 척결해야 했다. 그렇게 하지 못함으로써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반면 수양은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고 나아가 승리를 거머쥐었다. 쿠데타 당일 날, 일부 사람들이 이탈하는 소동이 있었음에도 수양과 한명회는 그대로 밀어붙였다.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김종서를 척살한 뒤에는 곧바로 궁궐로 쳐들어가 반대파들을 신속히 처단했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극적으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전두환의 '12.12 쿠데타'도 성공이 불가능해 보였다.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강제 연행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 이후에는 대체로 난관에 빠졌다. 특히 육군본부 측의 제9공수여단이 서울로 긴급 출동함으로써 전두환의 반란은 진압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최종 승리는 전두환 신군부에게 돌아갔다. 신군부의 기만책 및 과단성 있는 공세와 육군본부의 미온적 대처가 겹쳤다. 결정적으로 육군본부가 신군부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카드(9공수여단)를 스스로 거둬들임으로써 자폭하고 말았다. 전두환 신군부는 초기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권력을 휘어잡는 데 성공했다.
■어둠의 설계자
수양에게는 킹메이커로 여겨지는 뛰어난 모사꾼이 있었다. 바로 '한명회'다. 그는 신체에 부분적으로 장애가 있었고, 과거시험에도 여러 번 낙방한 전력이 있었다. 특별한 직업 없이 이곳저곳을 전전하다가 친구인 권람의 소개로 수양 밑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한명회는 모사꾼으로써의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계유정난의 설계자였는데, 그는 궁궐에서 '살생부'를 들고 반대파를 제거하는 데 일조했다. 이밖에 동물적인 감각으로 수양의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단종의 충신들인 '사육신'(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이 수양을 암살하고 단종 복위를 꾀했는데, 사전에 한명회가 이를 눈치채고 거사를 막았다. 그는 세조 시절은 물론 그 이후에도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천수를 누렸다.
수양에게 한명회가 있었다면, 전두환에게는 '허화평'이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17기이자 전두환의 비서실장이었던 그는 12.12 쿠데타의 명분을 설계했다. 정승화 총장을 겨냥해 '내란 방조' 혐의를 걸었는데, 이는 전두환 신군부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데 강력한 추동력이 됐다. 쿠데타 성공의 핵심 요소로 기능한 통신 감청도 허화평의 주도 하에 이뤄진 것으로 전해진다.
■피바람
계유정난 이래로 조정 안팎에서는 가혹한 피바람이 불었다. 우선 계유정난 당시 김종서, 황보인을 비롯해 병조판서 조극관, 이조판서 민신, 우찬성 이양 등이 한꺼번에 목숨을 잃었다. 안평대군은 김종서, 황보인 등과 한패가 돼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는 죄목으로 강화도, 교동도에 유배된 후 사사됐다. 조극관의 동생인 조수량, 충청감사 안완경, 정분 등 수양대군 반대파들도 귀양을 간 후 교살됐다. 수양은 함길도 도절제사였던 이징옥도 처단했다. 추후에는 단종 복위 운동으로 말미암아 사육신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수양의 처형 방식은 매우 잔인했다. 대표적으로 사지를 찢어 죽이는 '거열형'을 시행했다. 나아가 신료들을 처형장에 모이게 한 다음 끔찍한 처형 장면을 지켜보게 했다. 공포감을 심어줌으로써 추가 거사를 사전에 차단하려 한 것이다.
12.12 쿠데타 이후에도 피바람이 불었다. 신군부는 정적들을 대거 잡아들여 가혹한 고문을 가했다. 광주에서 '5.18 민주화 운동'이 발생하자, 공수부대를 전격 투입했다. 이때 유혈진압이 이뤄지면서 수많은 광주 시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 이후에도 신군부는 민주화 운동 및 시민사회에 대한 탄압을 지속하면서, 권위주의 독재 체제를 강화했다.
■쿠데타 정당성 확보
수양과 그 무리들은 쿠데타에 정당성을 불어넣기 위해 무진장 애썼다. 이의 일환으로 자신들의 거사를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고 명명했다. 계유년에 어지러운 난을 평정했다는 뜻이다. 스스로를 정의와 질서의 수호자로 규정한 반면, 반대편에 있는 세력은 세상을 어지럽히는 '난신적자'(亂臣賊子)로 규정한 셈이다. 누가 봐도 반란이었지만, 이토록 뻔뻔하기 그지없는 행위를 거리낌 없이 했다. 정확히 말하면 계유정난이 아니라 '수양의 난' 또는 '계유정변'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전두환 신군부도 쿠데타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다. 12.12 쿠데타를 우발적 충돌로 위장했다. 5.17 비상계엄 확대는 '북한의 위협과 사회적 혼란으로부터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조치'라고 규정했다. 민주화 운동 세력의 경우 사회 혼란을 야기하는 체제 전복 세력으로 낙인찍었다. 이후에는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허울뿐인 슬로건을 내세우며 반대파를 적극적으로 숙청해 나갔다.
■공신 인플레이션
수양은 계유정난 직후 거사에 직간접적으로 공을 세운 한명회, 권람, 정인지, 양정 등 43인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봉했다. 이들은 오랜 기간 수양의 주변에서 각종 특권을 누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게 된다. 이때를 계기로 공신세력의 득세가 조선 사회에서 일반화됐다고 볼 수 있다. 이는 후대에 왕권 약화 및 당파 싸움을 초래하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
신군부(하나회)도 쿠데타 성공에 따른 전리품을 나눠가졌다. 이들은 육군참모총장, 기무사령관, 수방사령관, 특전사령관 등 군부 내 요직을 독점했다. 행정부, 공기업, 국회 등에도 다수 진출했다. 사실상 이때의 대한민국은 '하나회 세상'이나 다름없었다. 특정 세력이 사회 곳곳을 장악하는 폐단이 노골화되면서 국가는 더욱 병들어갔다.
■불행했던 말년
수양은 말년에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아들과 손자들이 젊은 나이에 요절했고, 그 자신도 피부병에 걸렸다. 몸이 매우 가렵고 진물도 많이 났다고 한다. 밤에는 악몽에도 시달렸다. 수양은 고통을 덜기 위해 전국에 있는 온천과 사찰을 찾아다녔다. 말년에 이르러 한없이 나약해진 한 인간의 초라한 모습이 여실히 드러났다. 여담으로 실록에는 수양이 단종의 죽음과 관련해 후회했다는 기록은 없다. 다만 여러 정황상 후회하고 자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전두환 역시 말년이 고통스러웠다. 그는 권력을 내려놓자마자 수많은 공격을 당했다. 친구인 노태우 정권 시절에는 백담사로 유배를 떠났고, 김영삼 정권 시절에는 구속된 후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 이후에도 정치권과 시민사회로부터 지속적인 지탄과 공격의 대상이 됐다. 죽어서도 불행은 끝나지 않았다. 노태우의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진 것과 달리 전두환은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그 유해는 적당한 장지도 찾지 못한 상황이다.
#. 이 글은 오마이뉴스 메인에도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