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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상도 Mar 07. 2023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롭다

'정의롭다'라는 말은 올바른 길의 표현이다. 하지만 나는 그 일만의 용기를 내어 보기는 내적 성장이 성숙되지 못했다. 뉴스를 보아도 속으로 욕만 떠들어 될 뿐 행동으로 나서지 못하는 소심함이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MBTI는 ENFJ ‘정의로운 사회활동가’다. 몸속에 흐르는 정의로움을 끌어올리는 것은 글쓰기에 있었다. 글은 나에게 가장 정의롭게 날을 세우고 싶었다. '정의롭다'라는 뜻은 정의에 벗어남이 없이 올바르다. 올바른 글과 삶의 궤적을 그렸으면 하는 아주 작은 바람은 뜨거운 가슴속을 채웠다.          

정의롭지 못한 나는 끊어 오르는 열정이 몸보다 글로 풀었다. 글에 닿기 위한 그 어린 심혈의 기록은 나 아닌 타인을 위한 하나의 몸짓에 지나치지 않지만 누군가가 이 글을 보면 작은 손사래를 치며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했는지는 모른다.


정치, 경제, 문화, 교육, 행정과 우리의 일상 등 공정과 정의에 맞물려 있다. 공정이라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는 정의롭다. 반면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단순히 정의만 내릴 수 없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는 공정과 형평성, 정의를 원하고 있다. 혐오와 몰상식, 편견과 불평등 등의 오해가 낳은 것들은 우리를 병들게 했다.            

뉴스만 보아도 그 사람의 얼굴만 보아도 화가 치밀어 오를 때가 많아 버거웠다. 그럴 때마다 화를 꾹꾹 눌러 글로 내 일상을 공정하게 써 내려갔다. 아니 써내려 가야 했다. 글에 녹인 정의가 살아 숨 쉴 때까지 문장, 단어 하나에도 상처 아닌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의 진실을 담고 싶었다. 몰상식적 경외감을 느낄 때 나는 글로 정의를 논했다. 읽고 쓰는 나로서는 글로 비판하고 다듬고 녹아내리는 것이 최선일지 모른다. 




살아오면서 정의롭지 못한 말과 행동과 글이 공정이라는 착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공정하지 못했던 사회를 그저 비판하고 행동으로 담아내지 못했다는 아픔이 지금의 나를 만들어 냈다. 학교에서 취업전선에서 일터에서 그저 따르고 능력에 따라 떳떳하게 열심히 했을 뿐인데. 돌아오는 것은 나약함에서 오는 두려움과 오랜 미래가 그리 밝지 않다는 것임을 알았다. 너무 늦었다.           

샌델 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은 원제(능력주의의 폭정, The Tyranny of Merit)에서 실력은 온전히 자신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부모나 인맥 등 다른 요인들과 운이 작용한 것이기 때문에 실력이 완전히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라는 주장이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 결코 가볍지 않은 공정이라는 정의는 오늘날에도 미래에도 비판의 여지는 남겨두고 있었다.     


“기회는 평등하지 않고, 과정은 공정하지 않으며, 결과는 정의롭지 못한가?”     


삶이란 것이 공정하다는 착각 속에서 살아가곤 있지 않은가? 스스로에 질문하고 그 질문을 사회에 작은 목소리를 내 봐야 한다. 글이던 행동이던 우리에게 아직 정의가 살아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망의 끈을 힘을 믿을 수 있다는 것임을.

오늘도 내일이 조금씩 나아지는 것이 용기가 필요함을 그 하나의 물결이 흘러 큰 바다를 닿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다. 글이지만 글을 쓰는 것에 용기를 불어넣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니까. 살아가는 그 누군가에게 글은 삶의 몸짓에 희망을 품어 줄 수 있다. 나는 글을 쓸 때만 정의로운 것이 아니라 정의롭게 살겠다는 실천이 우선되어야겠다. 부끄럽지 않은 글은 정의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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