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전시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을 보고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은 우리에게 ‘세상 모든 것’의 역설을 보여준다. 초현실주의가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도 그러하다. 세계대전 이후, 물질문명의 잔인성과 전쟁의 참혹한 잔상을 목격한 젊은이들은 세계의 질서를 구축한 합리주의에 대해 의문을 가진다. 미술, 음악, 문학 등 분야를 막론하고 실존주의적 성향이 유행한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논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표현 방식과 꿈속을 엿보는 듯한 주제 의식이 자리 잡는다. 총 4개의 전시장에 전시된 작품 대부분은 1940년대부터 1980년대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한국 근대 사회의 흐름을 총망라한다. 광복 직후부터 한국전쟁 그리고 경제적 안정을 되찾을 때까지 한국 예술가들의 회의와 불안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1전시장은 나머지 공간과 달리, ‘삶은 다른 곳에 있다’라는 제목이 따로 붙어있다. 따라서 삶의 진정한 의미를 찾기 위해 몸부림쳐왔던 많은 예술가를 통틀어 보여준다. 한국인들에게 유럽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이질적이고 낯설게 다가온다. 그러나 수많은 한국 근대 작가의 작품들이 빈틈없이 빼곡하게 들어선 모습은 어딘가 낯설지 않다. 어린 시절에 부모님을 따라 방문했던, 한국 각 지역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많은 역사박물관의 풍경이 연상된다. 우리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의 아픔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예술가의 자유분방한 표현의 흔적 앞에서 가늠할 수 없는 추상적 형태를 통해 열심히 추측해 볼 수는 있다. 그 시절의 아픔과 젊은이들의 고뇌 그리고 그들이 떠올린 탈출구를 찾아낼 수 있다. 이러한 구성은 한국 근대 미술의 대장정을 마무리 짓는 듯한 인상을 주어, 마지막에 감상하기에도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작품은 정강자의 <자화상>이다. 작가가 무심히 부착해 놓은 청바지는 그림 속 여성(작가 본인)의 다리를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있어 성의 없어 보이기도 한다. 청바지가 작가에게 어떤 의미로 작용했는지는 와닿지 않았지만, 그만큼 시대와 사회의 억압을 격파한 그녀의 파격적이고 당당한 태도가 부럽다. 그래서 청바지처럼 나를 표현할 수 있는 간접적 사물이나, 마크 퀸의 <self>처럼 자기 신체의 일부를 직접 활용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머리카락을 모아서 붓을 만들거나, 머리카락을 손에 쥐고 물감을 묻혀 작품에 부착하는 것도 초현실주의 화가들이 추구했던 ‘자동기술법’으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이번 전시는 우리가 끊임없이 소통하게 한다.
2전시장에 들어가면 1전시장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말 그대로 나무와 풀들이 복잡하게 뒤엉킴으로써 전시 공간을 울창한 열대우림처럼 연출한다. 김종남의 작품은 피상적으로는 한 폭의 풍경화나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보인다. 또한 그림에서는 여러 종류의 생명이 느껴진다. 나무, 풀, 꽃, 곤충, 동물 심지어는 존재하지 않는 듯한 생물의 모습도 포착할 수 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왜 이 작품이 일반적 풍경화와 다른 묘한 느낌을 전달하는지 알 수 있다. 화폭 속 곤충과 동물은 자신을 또렷이 드러내지 않고, 식물에 의해 가려지거나, 보호색을 입은 채 식물과 한 몸처럼 어우러져 있다. 상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 둘의 경계를 파악하기 어렵다. 어쩌면 그림에 풀이나 나뭇가지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바로 이 지점이 우리가 익히 봐온 유럽의 초현실주의 작품과는 다른 특징을 보여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자연관(自然觀)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서양에서 자연은 주관에 대립하는 물질적 대상이자 신에 의한 피조물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양에서 자연은 신처럼 그 자체로 세계의 운영 원리를 지닌 주체이다. 따라서 자연은 지배·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합일되어서 일체감을 즐겨야 할 터전으로 인식 되어왔다.” 이러한 동양의 자연관에서 비롯된 무의식의 영향으로, 특히 한국 근대 작가들의 그림에는 물과 산이 많이 등장한다. 메마른 산과 바위의 모습으로 한국의 얼과 한을 표현하고, 화가인 자신이 그 속에 숨기도 하며 끊임없이 자연을 동경하고 전쟁과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로 여긴다. 서양 화가들이 생각하는 ‘삶의 다른 곳’이 꿈속이었다면, 한국 화가들에게는 자연인 것 같다.
1과 2전시장을 감상하며 느꼈던 묘한 불쾌감이 3전시장에서 선명하게 다가왔다. 박광호 작품 속 이미지는 인간이 아니지만 인간의 형태처럼 보이거나 인간인 줄 알았지만, 인간이 아니기도 하다. 사람이 아닌 생명체가 사람과 유사한 얼굴을 하고 있을 때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형태인 인체를 모방당한다고 생각될 때도 마찬가지다. 그런데도 우리는 끊임없이 색의 덩어리들로부터 그 형상을 발견한다. 변상증(파레이돌리아)은 형태가 없거나 모호한 이미지에서 구체적 형상을 식별해 내려는 심리나 현상이다. 예를 들어 달이나 구름에서 사람의 얼굴과 유사한 형태를 발견하는 경우가 있다. 정체를 알아볼 수 없는 덩어리들은 본격적으로 여성의 몸과 남성의 성기를 연상하게 한다. 작가의 무의식에서 성적 특징을 나타낼 수 있는 형태들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앞서 언급했듯, 가장 익숙한 대상이기 때문인 것 같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얼굴을 그릴 때도 매일 거울로 보는 자기 얼굴의 특징이 자연스럽게 반영되는 것처럼, 무의식중에 익숙한 인체의 실루엣을 그려내거나 발견하는 것이다.
또한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은 전시 공간조차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모습을 벗어나 있다. 현재 대부분의 전시회는 작품 간 간격을 넓히고, 희고 깨끗한 벽을 배경으로 한다. 그러나 이 전시회는 평균보다 훨씬 더 어두운 공간과 조명을 활용한다. 조명은 공간이 아닌 오직 그림만 비추도록 조정 되어있다. 또한 검정 벽들은 그림과 전시 공간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며 하나가 된 것만 같은 착시를 불러일으킨다. 전시장 가운데 위치한 몇 개의 기둥은 아크릴과 유사한 재질로 되어있어 주변 작품들을 반사한다. 그 기둥은 두세 개의 작품을 거울처럼 선명하게 반사하며 공간이 일그러진 듯한 독특한 느낌을 만들어내고, 전시장의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한층 더 고조시킨다.
박광호의 <산>과 <집> 앞에서 한 모녀가 대화를 나눈다. 이건 무늬가 튀어나와서 산이고, 저건 들어가서 집인 것 같다고 딸이 말하자 어머니는 좋은 생각이라며 칭찬한다. 이 장면은 미술작품이 우리의 능동적인 해석을 끌어낸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대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게 작품 활동을 했던 작가들의 열정도 고스란히 느껴진다. <초현실주의와 한국근대미술>은 단순히 과거의 회고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 많은 화두를 던진다. 또한 작품들은 ‘초현실’이라는 타이틀로 묶여있지만, 어떤 전시보다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한국의 역사를 겪어온 덕수궁에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한국인들이 모여있다. 한 발짝 물러서서 작품, 공간, 시간을 온전히 느낀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를 듣고 서로 나름의 새로운 추측을 해본다. 과거의 사람들이 남겨놓은 투쟁의 흔적과도 같은 작품 앞에 선 우리는 단순한 감상자가 아니라, 그 시간을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이 전시는 관람을 넘어, 우리가 앞으로 어떤 창작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