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꿈꿨던 가난한 30대 청년, 도봉산 아래 지하 자취방에서 부르던
- 박 상 민 -
1. 지하 월세방
도봉산역에서 걸어서 15분 도봉동 지하 보증금 200에 월 15만 원 월셋집은 단독주택과 한의원이 있는 집이었다. 영등포 해군회관 뒤 보증금 500에 15만 원의 옥탑방에서 보증금만 까먹고 변두리로 쫓겨난 셈이다. 나이 서른에 아무 연고도 없는 서울 상경. 일용직 노동자로 살아서 가난했지만 그래도 돌아보니 그때가 정말 자유롭고 진짜 재미있었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싶다.
독립 단편영화의 스텝으로 무보수로 일하며 언젠가는 나도 내 영화를 만들어 상도 받고 뜨겠지 하는 기대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어찌 보면 대책 없는... 내 자취방의 화장실은 주인집 계단의 경사로에 있는 빈 공간을 이용해서 만든 곳이라 특이했다. 영화 ‘기생충’의 그 가난한 가족의 화장실처럼. 변기에 앉으면 경사가 져서 몸을 웅크리고
허리를 숙여야 했다.
2. 서울우유
아, 언젠가 돈이 생겨서 근처 시장에서 계란과 두부 등을 사서 오는 길이었다. 돼지고기와 막걸리도 같이 사 오는 길이었다. 신김치에 맛있는 두부김치를 해 먹을 생각에 마음이 설렜다. 집에 와서 프라이팬에 고기 굽고 김치도 볶고 그런데 뭔가가 영 개운치 않았다. 뭐지 하고 찬찬히 생각해 보니 그렇다. 우유를 사서 검은 봉지에 넣지 않고 그냥 온 거다. 그때의 낭패감이란... 그 맛있고 영양 좋은 서울우유를 먹고 싶어서 거의 한 달을 침만 꿀꺽 삼켰는데 너무 아까웠다. 두고 온 하얀 그 서울우유.
그 집은 특징이 있었다. 지하에 방 두 개를 각각 세 놓았는데 다른 한 방도 나보다 나이가 좀 더 든 남자가 살고 있었다. 나처럼 조용한 사람이었다. 우리는 가끔 스쳐지나갔지만 인사를 하거나 말을 섞지는 않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마주칠 시간도 없었다. 생활 스타일이 다르니까 얼굴도 잘 모르고 그렇게 없이 사는 이웃이었다. 간혹 여자분들이 오고 가고 자고 가긴 했지만 조용히 지냈다. 여하튼 없는 노총각 프리랜서 아니 백수의 잃어버린 우유가 입맛을 다셨다.
3. 이웃집 남자
그리고 그 집은 뒤를 통해서 들어가는데 마당이 제법 크게 있었다. 주인은 건물 1층의 오래된 한의원 원장이셨고 아들은 내 또래의 남자인데 결혼을 해서 부인도 같이 살고 갓난아이도 있었다. 일을 다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우린 친해질 수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았다.
존재하고 있었지만 서로의 모습과 의미를 자연스럽게 감추게 되는 관계. 이상하고 기묘한 이웃 아닌 이웃. 그 대신 나는, 우린 자유로웠다.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니 그거 하나는 자유로웠다.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꿈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오로지 개인의 취향이고 개인의 자유로운 삶의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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