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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펜이 Feb 26. 2020

나의 아침 산책(라떼 시점)

빠의 아지트 아침은 우리 집 아파트보다 더 빨리 시작된다.
아침부터 마을 이장이 시끄럽게 방송을 해댄다.

전국노래자랑 지역 녹화방송이 내일 12:10분에 방송한다나 뭐라나...
마을 상수도 요금을 부과했으니 조만간 내 달라!

마을 진입로 경사면 설계를 위해 주민 설명회를 개최하니 모일 모시에 회관으로 참석하시라!
해바라기 파종지 울력을 하니 제날짜에 꼭 동참해주시라!

벼농사 친환경 농법을 위해 우렁이를 공급하는데 무슨 서약서도 함께 제출하시라~
당췌 무슨 소리인지 못 알아들을 소리로 한참을 떠들어댔다.

덕분에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우리 집 쥔장 빠와 맘은 단잠에 빠졌다.

두 분 모두 코를 심하게 골아서 간밤에 잠을 설쳤더니 연방 하품이 나왔다.
매일 밤 이러니 따로 살림을 차리든지 각방을 써야겠다.

아... 졸려...
그래도 내 마음을 제대로 아시는 분은 쥔장 빠밖에 없다.

이따금 카운티 캠핑카로 캠핑을 떠날 때 반드시 나=라떼도 꼭 데리고 다녀서 참 고맙다.
눈을 게슴츠레 뜨며 옷을 주섬주섬 입은 빠는 나를 한 아름에 안아 복층에서 아래층으로 내려준다.

이럴 땐 꼭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어 마당 자갈밭에 응~아와 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신다.

물론 뒤처리는 빠가 알아서 잘해주셔서 항상 감사하다.
아지트에서는 목줄을 달지 않고 산책해서 기분이 너무 좋다.

거추장스러운 목줄이 이 세상에서 가장 싫다.
그런데 아파트에서 산책하러 나갈 때는 항상 차고 나가야 하니 불만이다.

나도 이제 성년이 되었으니 내 앞가림은 잘 할 수 있는데 말이다.
여하튼 오늘은 빠와 함께 자주 산책한 호수공원으로 갈 모양이다.




아지트에서 나와 제일 먼저 마을회관 옆 나의 최애지 전봇대에 영역을 표시했다.
영역 표시할 때마다 내 구역이 넓어진 느낌이다.

그런데 간밤에 누군가 침범했는지 다른 녀석의 냄새가 지렸다.
그래서 더 많이 표시했다.




룰루랄라 콧노래를 부르며 빠의 캠핑카를 바라보며 왼쪽으로 꺾었다.
공룡 입만 한 커다란 굴다리가 나타났다.




뭐든지 다 집어삼켜 버릴 것 같아 지날 때마다 오금이 저렸다.
조금 있다 또 하나 건너야 하는데 벌써부터 콩닥콩닥이다.




여하튼 빠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주변 경관을 바라보며 멍도 때리고 이슬 먹은 풀냄새도 맡고 아주 중요한 지점에는 영역 표시도 하며 산책을 하다 보면 괴물 공룡의 입은 까마득하게 잊힌다.
호수로 가는 길은 아침 시간이라 차가 다니지 않아 아주 좋다.

내가 전세 낸 기분이라 이리저리 삐툴빼툴 다녀도 빠는 아무 터치도 안 해서 좋다.
오랜만에 내 세상 만난 것처럼 기분이 업된다.




기분이 좋아 달음박질도 치고 세상의 모든 냄새는 다 섭렵이라도 할 듯이 고개 처박고 킁킁거린다.
그러면 그간 쌓인 모든 스트레스가 확 날아간다.




이 맛에 빠와 맘이 산책하러 가자면 무조건 오케이다.
빠의 아지트가 생긴 뒤로 자주 산책해선지 이젠 산책로가 눈에 익는다.

빠 없이도 산책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
하지만 빠는 아마 허락해주시지 않을 것이다.




빠는 아까 마을 방송한 이장 집이 빨간 기와집이라며 손짓해주신다.
이제는 거의 매일 아침에 방송을 들으니 지겹다.

차라리 신난 노래라도 틀어주면 꼬리 흔들며 춤이라도 출 텐데...
아쉽다.




빠를 뒤따르거나 함께 나란히 걷다가도 갑자기 줄행랑도 쳐본다.
그러면 우리 빠는 눈이 동그래져서 "라떼야~" 라고 외치며 숨을 헐떡인다.

내가 도망갈 것도 아닌데 빠는 지레 겁먹고 내 뒤꽁무니를 달려오신다.
장난으로 한 건데 어쩔 땐 미안하기도 하다.




장난치며 걷다 뛰다 보니 어느덧 호수공원 주차장에 다다랐다.
며칠 전부터 주차된 카운티 캠핑카에 쥔장 빠는 관심이 많은지 오갈 때 주변을 배회했다.

노크해서 아는 체를 할 것이지 참 답답하다.
그래서 내가 "멍! 멍! 멍!" 세 번 노크했지만 사람들은 내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

아마 빠는 이른 아침 시간이라 실례가 될 것 같아 그냥 지나치나 보다.
이런 예의까지 지켜야 하니 인간 세상은 참 알다가도 모르겠다.




드디어 또 하나의 공룡이 나타났다.
나를 삼킬 듯이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눈 찔끔 감고 공룡 이쑤시개 같은 곳에 한 사발 영역 표시하고 줄행랑을 쳤다.

역시 빠는 내 이름 부르신다.
"라떼야~ 천천히 가~"




지옥문을 벗어나자 천국문이 열렸다.
바로 호수공원이 나타났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곳이다.
잔디밭도 많고 영역 표시할 나무도 많고 작은 호수도 있어서 물멍하기도 좋다.




이른 시간이라 무지갯빛 감도는 분수는 잠자고 있었다.
낮에 시원하게 내뿜는 분수를 보노라면 물속으로 뛰어들고픈 충동이 자주 인다.

언젠간 빠 몰래 반드시 뛰어들 테닷!
데크와 잔디, 황토 시멘트 길이 있어 나 같은 강쥐가 산책하기에 딱 좋다.




그러다 친구들을 만나면 금상첨화지~
함께 냄새도 맡을 수 있고 함께 뛰어다닐 수 있고~

날씨가 추워서인지 요즘은 거의 친구들을 못 만나서 아쉽다.
따스한 봄이 되면 많은 친구를 만날 수 있을 거란 기대를 하며 계속 앞으로 나아간다.

공원은 작지만 철 따라 피는 꽃을 보면서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인간만 꽃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도 좋아한다.




그래서 빠가 꽃 앞에서 카메라를 들이대면 포즈도 취해주곤 한다.
그래야 간식 하나라도 얻어먹을 수 있다.




약간 경사진 산책로를 따라가면 바다보다 더 큰 호수가 나타난다.
나는 맨 처음 보고 깜짝 놀랐다.

소싯적 아마 생후 6개월이었을까...
바다를 처음 보고 내 목욕탕이 왜 이리 커졌지 하며 무조건 바다에 뛰어들었다.

내가 워낙 물을 좋아하고 목욕도 좋아해서다.
그런데 그런 나를 보고 맘은 큰소리를 외치며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나는 좋은데~ 하는 찰라 내 몸의 수천 배에 달하는 파도가 나를 집어삼켰다.
몸이 우주에서 유영하듯 두둥실 떠오르더니 갑자기 생전 처음 먹어보는 물이 내 허파와 위장에 들어왔다.

코가 막히고 입이 막혀 정신이 혼미했다.
다 놔두고라도 짠맛에 구역질이 났다.

다행히 맘이 빨리 와서 구해줬을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같은 힐링 산책은 꿈도 못 꿨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다가 산에도 있다니...




내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다.
아무튼 호수 제방은 황톳길로 엊그제 눈이 오고 간밤에 비가 와서인지 완전히 내 취향이었다.




야호~ 를 외치며 제방과 정자 사이를 냅다 달렸다.
미끄러워서 더 신났다.

거기에 빠도 즐거우신지 카메라로 나의 동영상을 담기에 여념이 없으셨다.
그런데 갑자기 웬 남자의 시선이 뒷머리에 꽂혔다.




호수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를 찍으러 온 아저씨였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빙글빙글 돌았다.

그런데 갑자기 앞 브레이크가 잘 듣지 않아 앞으로 그대로 꼬그라졌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진다더니 내 모습이 꼭 그런 우스운 꼴이 되버렸다.

빠의 얼굴을 보며 괜히 겸연쩍어져 살포시 빠의 다리에 몸을 문질렀다.
그래도 빠는 즐거우신지 호수 둘레길로 나를 인도해주셨다.




제방길이 끝나자 또 하나의 아픈 추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작년 봄이던가 내가 겨우 돌 지났을 무렵 이 징검다리를 건너다 발을 헛디디었다.

그래서 그대로 물속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빠의 손을 겨우 잡고 올라왔다.
물에 대한 안 좋은 추억 두 번째다.

몇 년 안 살았지만 앞으로 이런 추억이 또 생길까...
하지만 이제 성년이 된 만큼 이런 징검다리는 식은 죽 먹기다.



호수에는 청둥오리 세 마리가 여유롭게 수영하고 있었다.
아픈 추억에도 불구하고 저들과 함께 놀고 싶었다.




하지만 쥔장 빠를 생각해서 참기로 했다.
대신 호수 위로 드러난 앙상한 나무의 반영을 즐기며 산책에 집중했다.

내가 봐도 참 멋지다.
발로 그림을 그릴 수만 있다면 하얀 도화지에 옮기고 싶었다.

인간은 손발이 없으면 입으로도 그리던데...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둘레길을 따라 작은 개울도 지나고 오르락내리락 데크도 걸었다.
초록 잎이 두드러지는 신호대도 보고 누군가의 소원이 깃든 돌탑도 보며 걸었다.

둘레길을 돌수록 산 냄새가 폐부 깊숙이 들어와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은 이런 맛에 등산이나 산책을 하나 보다.



내가 냄새 맡느라 뒤처지면 빠가 나를 기다려주시고, 내가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면 내가 빠를 기다린다.
우리 둘은 환상의 콤비로 보이지 않은 신뢰가 자리하고 있다.




둘레길을 돌고 호수 입구에 다다르자 시들어진 국화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작년 가을에는 입구를 노랗게 수놓아 보기 좋아서 그때를 생각하며 향기를 맡았다.

아직도 향긋한 냄새가 조금 남아 있었다.
다시 아지트를 향하며 조금 전 봤던 풍경을 또다시 역방향으로 보니 또 다른 맛이 났다.

아지트에서 가까운 두 번째 공룡 입을 지나면서부터 아지트까지 혼자 찾아갈 수 있어서 빠를 뒤로하고 냅다 달렸다.
초창기에는 빠가 지레 겁먹고 나를 쫓아왔지만 지금은 눈 깜짝도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항상 집을 제대로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산책하며 건강과 힐링을 목적으로 하듯이 나도 그래서 좋다.

아침 산책을 한 시간 정도 했더니 시장기도 돌았다.
역시 빠는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으신다.




흙투성이인 내 네 발을 따뜻한 물로 깨끗이 씻어주시고 곧바로 아침상까지 차려주신다.
그런데 밥을 먹을 때마다 아쉽다.

내가 살찐다며 내 밥양을 제대로 안 채워주시기 때문이다.
하기야 내 몸이 아주 조금 토실토실하긴 하다.

하지만 먹고 싶은 건 먹고 운동으로 살을 빼면 될 텐데...
꼭 식사량을 줄이거나 다이어트 사료라며 영양가 없는 헛배만 부른 밥을 주니 미치겠다.

내 의사를 관철하기 위해 단식투쟁이라도 벌여야 하나 고민이 된다.
그런데 단식투쟁하면 굶는 나만 손해 아닌가ㅜㅜ




그나저나 코로나 때문에 쥔장이 걱정이 많다.
아파트 반경 1km 이내에 확진자 동선이 수두룩하다고 아지트로 피신 왔다.

코로나가 무슨 폭탄 이름인가?
우리 같은 강쥐는 끄덕없는데 사람들은 몸이 많이 부실한가 보다.

빨리 그 폭탄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그래야 쥔장 따라 캠핑도 가고 그럴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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