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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Jun 23. 2024

무협의 액션을 사유하는 모션/이모션

허우 샤오시엔의 <자객 섭은낭>

<자객 섭은낭>에 대해 이야기할 때 섭은낭의 마음, 특히 머뭇거림이 주로 언급된다. 눈에 보일 리 없는 마음을 보았다고 착각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장계안을 살해하는 데 결국 실패했다는 서사적 맥락 하에 섭은낭의 행위가 망설임이란 단어로 뭉뚱그려 지는 것은 아닐까. 혹은 무언가를 행하는 섭은낭보다, 무언가를 지켜보는 섭은낭의 행동이 망설인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킨 것일까. 그도 아니라면 그 모든 흔들리는 사물들 -촛불들, 이파리들, 얇은 천의 움직임- 에서 감정 표현을 거의 하지 않는 그녀의 마음을 보았다 여기게 되는 것일까. 흔들리는 사물이나 시선을 통해 영화적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양상은 단지 <자객 섭은낭>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 세계를 관통하는 것이기도 하다. <밀레니엄 맘보>에서 공간 사이로 내려뜨려 진 오색의 발이나 촛불과 라이터의 불빛이 그러했듯, 허우 샤오시엔은 흔들리는 사물을 카메라와 대상 사이에 두면서 그것을 얇은 막으로 삼았다. 이 얇은 막은 <해상화>에서 촛불이 켜지고 꺼지듯 서서히 점멸하는 쇼트와 마찬가지로 불안정한 상태에 처한 인물을 가리키는 동시에 이들 간 모종의 연계를 동시에 가리켰다. 사물의 움직임이 인물의 상황과 심경을 대체하는 것처럼 보이는 시퀀스는 <자객 섭은낭>의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영화가 주는 감흥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는 흔들리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만큼이나 단호함에 대해 말해야 한다.


<자객 섭은낭>의 이야기는 ‘과연 은낭이 계안을 죽일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큰 틀에 기반을 두고 전개된다.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에서 이러한 행위(살인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가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상황은 낯설다. 왜냐하면 초기작부터 허우 샤오시엔의 인물들은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기보다는 그저 ‘살아가는’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종종 등장하는 ‘일상성’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일상성은 고인 삶으로서의 일상이 아닌, 떠도는 것으로서의 삶이다. 그러니까 허우 샤오시엔의 일상이라는 말 어딘가에는 비상이라는 단어가 숨겨져 있다. 허우 샤오시엔 인물들은 이를테면 방학을 맞아 잠시 외출한 사람들 같다. <동동의 여름방학>에서 방학을 맞은 동동과 딩딩, <쓰리 타임즈>에서 메이를 찾아 헤매는데 휴가를 다 써버린 군인 첸 등은 비교적 직접적으로 제시된 경우고, <해상화>의 머물다가 떠나길 반복하는 손님, 결혼과 쇠락의 갈림길에 선 유녀들의 삶처럼 암시적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그들은 어딘가로부터 이주한,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다. 그것은 <동년왕사>에서처럼 삶 전체를 두고 머물고 떠나는, 삶과 죽음의 문제로 확장되기도 한다. 허우 샤오시엔의 인물들은 직업을 가졌는가의 여부와 관계없이 짧은 휴가를 즐기듯 배회한다. 섭은낭 역시 어딘가로 떠났다가 다시 돌아온 이방인이자 불청객으로, 그녀 역시 ‘허우 샤오시엔적’ 인물이다. 그러나 일상적 인물인 은낭의 위치는 그녀의 임무로 인해 흔들린다. 임무의 분명함과 불안정한 위치의 모순된 결합이 섭은낭을 이방인 중의 이방인으로 만든다. 그녀의 행위는 종종 흔들리면서도 단호해 보이고, 단호해 보이면서도 흔들리는 것 같다. 다시 말해 그녀의 행위는 머뭇거림이나 결단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슬로모션의 쓰임

프롤로그의 흑백화면이 주는 매혹에 가려 상대적으로 간과된 것이 있다. 프롤로그에서 묘사된 섭은낭의 살인행위에 대한 것 말이다. 섭은낭은 스승 가신공주의 명에 따라 말에 탄 남자를 단박에 살해한다. 섭은낭의 과감한 행위는 이후 섭은낭의 지체된 행위와 언뜻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섭은낭이 날다시피 뛰어올라 단숨에 상대의 목을 베는 결정적인 장면이 슬로모션으로 처리된 점이다. 슬로모션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론이 가능하다. 슬로모션은 무협영화에서 흔한 방식이며 대부분 관객은 이것이 무협영화라고 상정했기 때문에 의문을 품지 않았거나, 무협영화로 상정하지 않더라도 슬로모션은 너무 흔해져서 이제 기법이라는 생각마저 들지 않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슬로모션은 전체 영화적 흐름 속에서는 잠복해 있었지만, 곱씹을수록 그 이질성은 강화된다. 그러므로 잠깐 스치는 장면에 불과했다 해도 슬로모션이 왜 등장했는가에 관해 물어야 한다. 가장 손쉬운 대답은 무협의 모션을 통해 도로 무협을 해체하는 역설적 삽입이라 평가하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가 무협영화에서 기대하는 비주얼을 배반하는 측면이 있지만, 그 장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비판적 변용이 아닌 자기화에 가까웠다. 때문에 화면의 미장센이 지닌 내적인 동기가 분명히 있으리라고 짐작된다. 결국 서사적 맥락에서 대답을 찾아야 한다. 프롤로그의 살인 이후 은낭은 줄곧 살인에 실패한다.(실패라기보다는 스스로 실패하기를 선택했다고 표현하는 편이 더 적절할 것이다.) 프롤로그에서 보여준 그녀의 결단은 뒤따라오는 지체된 행위와 대조되며, 결국 후자가 강조된다. 이런 분석은 결국 기능적인 해석에 불과하기에 주저된다. 결국 서사적 틀이나 무협영화의 틀을 가지고 장면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장면 자체를 좀 더 들여다봐야 한다.


물론 <자객 섭은낭> 프롤로그의 슬로모션은 예외적인 방식일 뿐, 전체를 관통하는 형식이라고 보기 힘들다. 허우 샤오시엔은 인터뷰에서 마치 자신은 슬로모션을 사용한 일이 없다는 듯, 무협영화에서 종종 쓰이곤 하는 슬로모션 방식에 대한 경계심을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그는 자신이 슬로모션을 사용했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일까. 그보다는 자신의 슬로모션이 관습적인 슬로모션과는 다르다는 것에 대한 항변 같다. 슬로모션이라는 인위적인 장치를 사용하는 것은 <자객 섭은낭> 뿐만 아니라 허우 샤오시엔의 영화에서 예외적인 선택이다. 그렇다면 <자객 섭은낭>의 슬로모션은 다른 무협영화를 포함, 기존에 슬로모션을 사용하는 맥락과 다를 거라고 가정할 수 있다.


루이스 자네티는 슬로모션을 설명하면서 ‘마치 꿈속에서 춤추듯 느리게’라고 수식한다.(영화의 이해) 이 말은 슬로모션은 움직임이 마치 다른 세계에서 펼쳐지고 있는 듯 낯설게 보인다는 뜻을 함축한다. 이 설명을 빌려 관객이 <자객 섭은낭>의 슬로모션을 의심 없이 받아들인 이유에 대해서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함과 동시에 그것이 다른 세계라는 점을 영화가 전제했으며, 이 세계의 흐름이 슬로모션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졌다고 말이다. 여기에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 방식의 근원은 흑백 화면에 있다. 허우 샤오시엔은 프롤로그를 흑백으로 처리한 이유에 대해 과거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이 말을 과거를 표현하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흑백을 사용했을 뿐이라고 오해해선 안 된다. 물론 허우 샤오시엔은 <호남호녀>에서 과거를 나타내기 위해 흑백을 사용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과거를 재연한 장면과 현재의 인물이 과거를 연기하는 장면을 똑같이 흑백으로 표현하는 동시에 현재를 나타내는 컬러의 시간 역시 분화하면서 결과적으로는 과거와 현재를 겹쳐보게 한다. 세 가지 시간대를 넘나드는 <쓰리 타임즈>의 경우 1911년을 그릴 때 대사를 자막으로 처리하는 방식을 사용하되 그것이 현재와 동떨어진 과거임을 드러내는 방식의 흑백은 사용하지 않았다. <자객 섭은낭>의 흑백화면 역시 그것이 연속된 시간 순서상 과거일 수는 있지만 이후에 전개된 섭은낭의 시간과 동떨어진 시간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자객 섭은낭>을 보면서 로베르 브레송을 떠올렸다면 그것은 흑백 프롤로그의 영향이 크리라고 짐작한다. 흑백영화로부터 출발한 로베르 브레송은 흑과 백, 그리고 그사이의 회색이미지를 통해 하나의 엄정한 세계를 구현해냈다. <자객 섭은낭>의 프롤로그 역시 이런 엄정함에 가깝다고 느낀다. 그러나 로베르 브레송과 허우 샤오시엔의 엄정함은 같지 않다. 특히 행위를 보여주는 방식에서 두 감독은 상이한 태도를 보인다. 브레송의 작품 중 행위가 두드러지는 작품 중 하나인 <소매치기>를 예로 들면, 브레송은 클로즈업을 통해 신체를 파편화시키는 방식을 주로 쓴다. 브레송은 클로즈업을 통해 행위를 동기에서 떨어뜨려 놓은 채 손의 움직임에 매혹되도록 이끈다. <자객 섭은낭>에서 은낭의 행위는 분명한 목적이 있고, 이를 설득하는 과정이 존재한다. 스승은 은낭에게 남자의 죄목을 이야기하면서 은낭을 설득하는 동시에 관객을 설득한다. 은낭의 행위는 절제하다가 한 번에 내리꽂는 과감한 결단력에 기댄다.


<자객 섭은낭>과 가장 가까운 브레송의 영화는 절제된 흑백의 초기작보다는 컬러로 찍힌 후기작, <호수의 란슬롯>이다. <호수의 란슬롯>이 서양의 기사도를 보여준다면 <자객 섭은낭>은 동양식 자객의 도를 보여준다. <호수의 란슬롯> 역시 프롤로그에서 살인의 이미지들이 나열된다. 갑옷을 입고 철모를 쓴 사람들이 부딪히고 머리가 떨어진 시체의 목에서 피가 솟구치는 이미지들을 지극히 건조하고도 반복적으로 묘사한다. 잔인한 장면을 잔인하게 바라보기, 이것이 브레송의 윤리인 것 같다. 프레임을 한정한 채 반복하는 브레송의 방식과 달리 허우 샤오시엔은 반복을 통해 행위를 강조하는 법이 없다. 대신 허우 샤오시엔은 종종 분리된 것을 잇는다는 느낌을 종종 받는다. 결국 행위와 행위하지 않음을 멀리 있지 않다. 잔인할 것 없는 행위를 한 번 더 고민하기, 이것은 허우 샤오시엔의 윤리 같다.


살해에 이르는 일련의 장면을 좀 더 들여다보자. 프롤로그에서 가신공주는 말 탄 남자를 가리켜 아버지를 독살하고, 형제를 살해한 자라며 그를 분명히 죽일 것을 명령한다. 스승의 단검을 건네받은 은낭은 풀숲에 숨어 때를 기다리다가 단숨에 남자를 살해한다. 그리고 이것을 감독은 슬로모션으로 처리한다. 이때 카메라가 놓인 자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카메라는 섭은낭을 마주보는 위치에 놓여있고, 살해되는 남자는 그사이에 존재한다. 그러니까 카메라는 남자를 살해하는 은낭을 뒤에서 훔쳐보거나 베인 남자의 목을 보여주는 대신 섭은낭의 과감한 결단을 보여준다. 섭은낭과 남자의 거리는 가깝게 맞닿아 있지만, 얼굴에 피를 뒤집어쓰는 자극적인 묘사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저 남자가 목을 떨구는 것으로 행위의 결과를 압축한다. 행위의 순간, 시각적인 것보다 두드러지는 것은 오히려 음향이다. 칼이 꽂히는 소리와 베는 소리를 통해 우리는 그녀의 살해 행위를 보았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러나 슬로모션은 그저 섭은낭이 남자를 죽였다는 사실을 단순히 인지하는 것 외에 그 순간 무언가 더 보아야 할 것이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슬로모션은 행위의 순간을 늘리는 동시에 그것을 가까이에서 포착한다. 왜 죽이는 순간 섭은낭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보여주어야 한다고 판단한 것일까.


이어지는 다른 흑백의 프롤로그가 있다. 허우 샤오시엔은 이를 두 번째 프롤로그라고 표현했다. 이 표현은 둘 사이에는 명백한 분리가 있음을 표현한 말이다. 첫 번째 프롤로그에서 은낭은 암살에 성공하지만, 두 번째는 실패한다. 남자가 어린 아들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은낭은 ‘아이가 귀여워 죽이지 못했다’고 말한다. 그녀의 말에서 은낭이 자신의 실패를 명확히 들여다보고 있음이 드러난다. 두 개의 프롤로그는 각각 흑과 백의 세계를 보여준다. 하나는 죽일 수 있는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죽일 수 없는 세계이다. 둘 중 어느 쪽을 흑이고, 어느 쪽을 백이라고 해야 할지 망설여진다. 단순하게는 죽이는 것을 흑, 살리는 것을 백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가신공주와 은낭이 입고 있는 옷은 각각 백과 흑으로 나뉜다. 첫 번째 프롤로그에서 가신공주의 명에 의해 살인을 했고, 두 번째 프롤로그에서는 은낭 스스로의 선택으로 살인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첫 번째 세계를 백(가신공주)의 세계, 두 번째 세계를 흑(섭은낭)의 세계라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한 것 같다. 두 개의 프롤로그에 대해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첫 번째 프롤로그에서 은낭은 스승의 이야기에 의존해 행위 여부를 판단한다. 그러나 두 번째 프롤로그에서 역시 스승은 은낭에게 그를 죽여야 하는 이유에 관해 설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은낭은 암살을 포기하면서 자신이 들은 것(죽어 마땅한 사람)보다 자신이 본 것(아이를 예뻐하는 사람)을 더 믿는다. 은낭이 스승으로부터 어릴 적 함께 자란 계안을 죽일 것을 명하는 장면 뒤 화면은 컬러로 전환된다. 그녀는 흑백으로 분리된 냉혹한 선택의 세계를 지나 제3의 선택지, 즉 색의 세계로 이행한다.



액션 이후를 위한 끈

슬로모션과 짝을 지어 또 다른 비현실적인 액션을 구현하는 장치는 와이어 액션이다. 슬로모션과 와이어 액션은 비단 무협만이 아닌 대부분의 액션에서 필수적으로 쓰이는 기술이다. 슬로모션이 카메라의 움직임과 관련된 기술이라면 와이어 액션은 배우의 몸을 통해 구현된다. 허우 샤오시엔은 중력의 법칙을 뛰어넘는 액션은 보여주고 싶지 않다고 말하며 자신의 영화 속 액션을 ‘인간적인 액션’이라 칭한 바 있다. 인간적인 액션이 무엇인지 따지기 전에 먼저 중력의 법칙에 대한 존중이 어떤 의미인지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허우 샤오시엔의 발언은 그가 그의 영화세계에서 구축해온 인간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과 맞물려, 기술을 절제하고 땅에 발붙인 인간을 통해서만이 인간에 대한 존중을 표현할 수 있다는 말로 오인될 소지가 있다. 이와 관련해 언급하고 싶은 영화는 허우 샤오시엔의 근작 <빨간 풍선>이다. 물론 <빨간 풍선>에서 풍선이 의인화되었다거나 극을 이끌어가는 것도 아니기에 적절한 예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중력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인간에 대한 존중으로 직접 연결된다는 오해를 깨뜨리기에 충분하리라고 본다.


<빨간 풍선>에서 풍선은 머물 수 없는 존재다. 풍선은 공기 중에 내놓으면 하늘 위로 두둥실 솟아오르며 떠다닌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를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라면 중력의 법칙을 적용받을 수 없는 것은 풍선의 운명이다. 풍선에게 중력의 법칙이 되어주는 것은 인간, 특히 아이들이다. 풍선을 매듭짓고 남은 긴 꼬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단단히 붙잡은 아이의 손이 풍선에게는 그를 떠나지 못하게 하는 중력이다. 은낭은 유독 아이들에게 흔들린다. 그가 가파른 산중에 지어진 본래의 거처를 떠나 하산하게 된 이유 역시 크게는 아이에게 있다. 섭은낭은 어쩌면 인간의 육체에 깃든 빨간 풍선이다.


허우 샤오시엔은 <빨간 풍선>의 모티프가 된 알베르 라모리스의 동명영화와는 달리 풍선 매듭을 붙잡은 아이의 손을 보여주지 않는다. 빨간 풍선이 직접 등장하는 것도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뿐이다. 그럼에도 프롤로그에는 풍선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이 담겨있다. 허우 샤오시엔은 풍선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으면서 인간과의 관계를 보여주는 데 골몰한다. <빨간 풍선>의 프롤로그는 한 아이가 지하철역 입구에서 위를 쳐다보며 혼잣말을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풍선아’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나무에 풍선이 걸린 모양이다. 소년은 자리를 맴돌며 자신과 함께 갈 것을 한참 애원한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자 소년은 포기한 듯 작별을 고하며 지하철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간다. 그제야 카메라는 소년이 쳐다보고 있던 곳을 보여준다. 그곳에는 빨간 풍선이 나무에 걸린 채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다. 이후 풍선은 나무에서 내려와 지하철 어귀에 머문다. 지하철 문을 사이에 두고 풍선과 소년은 다시 만난다. 그러나 소년은 풍선에 손을 뻗지 않는다. 풍선도 소년이 탄 지하철에 타지 않는다. 둘 간의 간격은 서로 다른 성질을 가진 각각을 존중하면서 둘을 잇는 허우 샤오시엔의 방식이다. 창문을 사이에 둔 풍선의 무정형 운동성에서 풍선과 인간의 마음이 만난다.


섭은낭이 철저히 중력에 지배당하고 있음을 인정할 때, 중력이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무협영화는 상승하는 운동성이 인간 신체를 통해 구현되는 찰나를 통해 중력을 벗어나는 순간을 묘사하곤 한다. <자객 섭은낭>에서는 지붕, 천장 등 높은 곳을 점한 섭은낭을 보여주되, 그녀가 그리로 이동하는 장면을 과감히 생략한다. 섭은낭은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는 듯 그냥 거기 있다. 첫 번째 암살 실패 장면에서 섭은낭이 머무는 곳은 인간의 시선이 잘 닿지 않는 천장 가까운 난간이다. 은낭의 표정은 마치 그곳이 그녀의 공간인 것처럼 평안하다. 허우 샤오시엔의 액션은 인간의 것이되, 자객이 점하는 위치는 때때로 중력을 벗어난 순간을 이미 통과한 뒤처럼 느껴진다. 은낭이 계안과 지붕 위에서 결투를 벌이는 장면에서도 그녀가 어떻게 지붕 위에 올라갔는가는 생략한 뒤 결투를 끝내고 지붕에서 땅으로 훌쩍 뛰어 내려가는 뒷모습을 보여준다. 은낭이 땅으로 내려가는 순간은 드물게 와이어 액션의 흔적이 두드러진다. 보통 무협의 인물을 끌어올리는 데 사용되던 와이어가 여기에서는 인물을 아래로 안전하게 끌어내리는 데 쓰이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어쩌면 섭은낭은 신계에서 사람의 세상으로 내려온 반신반인 같다. 아니 풍선의 끈이 세상과 만나는 줄이듯, 와이어를 통해서만 세상에 내려앉을 수 있는 ‘빨간 풍선’ 같다. 영화 <빨간 풍선>은 풍선이 인간을 뒤로하고 하늘로 떠나는 쇼트로 끝난다. <자객 섭은낭>은 섭은낭이 다시 한 번 인간 세계로 내려오면서 끝난다. 한번은 스승의 명에 의해서였고, 두 번째는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다. 떠남과 머묾으로 요약할 수 있을 <빨간 풍선>과 <자객 섭은낭>의 마지막 선택은 대조를 이루는 동시에 서로 마주본다.


빨간 풍선


시선이 보는 것

결국 허우 샤오시엔이 말하는 인간적인 액션의 실체는 인간의 마음이 드러나는 액션인 것 같다. 이제 슬로모션에서 섭은낭의 얼굴을 다시 보자. <자객 섭은낭>의 슬로모션과 가장 가까운 슬로모션을 찾자면 액션 도중 인물의 감정을 보여주기 위해, 얼굴 클로즈업과 함께 쓰이는 슬로모션이다. 배우 장쯔이가 출연한 두 편의 영화인 이안의 <와호장룡>과 왕가위의 <일대종사>에는 액션의 순간에 장쯔이의 얼굴 클로즈업을 슬로모션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클로즈업은 인물의 행위 도중 흔들리는 인물의 감정을 표현하는 감정의 슬로모션으로 이때 감정이 행위에 우선한다. 그러나 <자객 섭은낭>의 슬로모션은 감정의 슬로모션으로만 보기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다. 은낭이 살해하는 이는 <와호장룡>이나 <일대종사>와는 달리 묘한 연정을 품는 대상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섭은낭의 얼굴 역시 무정함에 가깝다. 슬로모션은 결코 행위의 단호함을 헤치지 않은 채로 장면에 침투한다. 슬로모션에 삽입된 소리 역시 누군가의 죽음이 아닌 칼로 목을 긋는 행위를 강조한다.


섭은낭의 얼굴을 마주보던 카메라는 일종의 거울이다. 그 순간 은낭은 자신의 행위를 똑똑히 들여다본다. 어쩌면 두 번째 프롤로그에서 천장에 있던 은낭은 남자를 암살하는 자신의 모습을 그려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천진한 아이의 얼굴을 본 그녀는 자신을 그 자리에 넣을 수 없다고 판단한다. <동동의 여름방학> <동년왕사> 등 아이를 주인공으로 삼은 허우 샤오시엔의 몇 편의 영화에서 허우 샤오시엔은 무언가를 멍하니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을 영화 속에 새겨 넣은 적이 있다. 무언가를 가만히 지켜보는 섭은낭의 시선과 허우 샤오시엔 영화 속 무언가를 바라보던 아이들의 얼굴이 겹친다. 행위의 결과가 아닌 행위하는 도중 행위 자체를 들여다보기. 그리고 대상에 대한 감정이 아닌 행위와 나 사이에 벌어지는 감정을 들여다보는 것이 슬로모션의 목적인 것 같다. 그러므로 섭은낭의 슬로모션은 인식의 쇼트이자, 선택의 쇼트다. 그렇게 액션은 인간에게로 돌아온다.


<인문예술 잡지 f>20호(2016년 3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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