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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소희 Jun 24. 2024

해고할 수 없는 사랑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2023)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홀라파는 안사와 데이트 중에 마시던 커피에 술을 탄다. 공장 노동자 홀라파는 작업 중 몰래 술을 마시다 적발되어 해고된 참이다. 그 사이 카운터에서 빵을 주문하던 안사는 거울을 통해 이 장면을 목격한다. 안사의 집에서 데이트하던 날에도 홀라파는 겉옷에 숨겨둔 술을 몰래 마신다. 안사는 이번에는 모른 척하지 않는다. “아버지와 오빠가 술로 죽었어요. 술고래는 필요 없어요.”라는 안사의 말에 홀라파 역시 지지 않고 대꾸한다. “잔소리꾼은 필요 없어요.”     


이와 비슷한 장면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다른 영화, <황혼의 빛>에도 등장한다. 건물 관리원 코이스티넨은 카페에서 우연히 만난 미리야와 가까워지지만, 이는 미리야가 의도를 숨기고 접근한 결과다. 미리야는 코이스티넨에게서 건물 열쇠를 훔치기 위해 그의 커피에 수면제를 탄다. 미리야와 일당들은 코이스티넨이 잠든 사이 그의 열쇠를 훔쳐 보석상을 턴다. 코이스티넨은 이 사건의 용의자로 구금되었다가 증거 부족으로 풀려난다. 그의 앞에 다시 미리야가 나타난다. 집으로 초대된 미리야는 코이스티넨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그의 옷에 열쇠를 넣어 범죄를 완수한다. 코이스티넨은 이 장면을 목격하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들이닥친 경찰에 체포되어 실형을 선고받은 뒤에도 말이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
황혼의 빛

<황혼의 빛>의 수면제와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술은 액체와 뒤섞여 자취를 감춘 채 인물에게 영향을 미치는 물질이다. 두 영화의 결정적 차이는 그 영향이 타인에게로 향하는지, 자신에게로 향하는지다. 이에 따라 이야기의 운명은 달라진다. 스스로 곤경을 불러오는 편에 선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타인에게로 향했던 동작의 방향을 자신에게로 돌리면서 세계를 비관하는 데서 벗어나는 것처럼 보인다. <황혼의 빛>에서 영화를 지배하던 정조는 반전 없는 무력감이지만,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변화의 여지를 남긴다. 코이스티넨은 끝내 죽지만, 홀라파는 죽음 가까이에서 다시 살아난다.      


부동의 시선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 인장처럼 박힌 것은 무언가를 바라보는 인물의 눈이다. 바라보는 시선이 인상적인 이유는 특정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서사의 목적이나 역할에서 빠져나와 있기 때문이다. 행위나 사건에는 자주 시선이 따르지만, 그 시선이 꼭 발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몰래 무언가를 하는 행위는 차라리 목격하는 시선의 호위를 받는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적 시선이라 부르고 싶은 어딘가를 응시하는 고정된 시선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장의 마약 거래 현장을 목격했을 때나 경찰에 체포될 때도 안사는 별다른 표정 없이 그저 그 광경을 바라본다. 안사 주위에 선 다른 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행위 역시 그와 동일하다. 사람들은 어떠한 움직임이나 반응도 없이 그 자리에 붙박여있다. 그의 영화에서 자주 등장하는 펍의 공연 장면에서도 무대를 관람하는 사람들은 호응하는 법 없이 이따금 술을 들이켤 때를 제외하고는 입을 다문 채 부동자세로 무대를 응시할 뿐이다. 심지어 무대에서 노래하는 사람들조차 무표정의 부동자세를 고수한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영화관 장면은 그의 영화 속 시선이 어디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스스로 노출하는 장치처럼 보인다. 목적 없이 목격하는 인물들처럼 영화관에서 사람들은 부동자세로 앉아 화면에 시선을 고정하지만, 여기에는 영화를 본다는 것 외에 어떤 목적도 없다. 물론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보듯, 사랑에 빠진 사람에게는 연인의 얼굴을 원 없이 바라보는 장소라는 다소 예외적인 경우도 있지만 말이다.      


영화관의 시선을 중심으로 생각할 때, 영화관 바깥에서도 인물들은 종종 영화를 관람하는 상태처럼 보인다. 달리 말해 시선은 영화 속에서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사태에 일종의 거리감을 기입한다. 이러한 거리감은 그들이 목격자일 때만이 아니라 <황혼의 빛>에서처럼 당사자일 때조차 그렇다. 인물들은 사건의 당사자이자, 목격자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곤경도 이들을 완전히 삼킬 수 없다.     


목격이 목적을 지닌 것처럼 보이는 예외적인 순간은 도약과 추락이라 명명할 수 있는 대조적인 경향으로 갈린다. 가장 긍정적인 도달점이 사랑이라면 그 반대편에는 해고가 있다. 안사가 동료들과 마트에서 음식의 유통기한을 점검할 때, 험상궂은 인상의 덩치 좋은 다른 직원이 눈을 크게 뜬 채 동행한다. 그 눈은 안사의 가방에 있던 빵 하나를 발각해 그를 해고하는 데 기여한다. 반대로 펍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안사와 홀라파가 서로를 곁눈질하는 장면에서 시선은 즉각적인 관계의 진전으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이미 하나의 행위다.      


감시와 해고의 시간이 가차 없이 빠르게 진행되는 것과는 달리, 관계의 시선은 그보다 진득한 시간을 요구한다. 시간을 요구하는 관계 맺음은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스마트폰 시대에 고집스럽게 과거의 소통 방식을 고집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전화번호를 간단히 입력하거나 캡쳐하고 메신저로 누군가를 찾는 것이 익숙한 시대에 안사와 홀라파는 번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주고받는다. 안사가 홀라파에게 건넨 쪽지가 호주머니에서 떨어져 바람에 몰래 날아가 버릴 때는 마치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는 것 같은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원제에서 따온 다른 제목, Fallen leaves는 낙엽을 닮은 한 장의 종이와 함께 잎이 떨어지는 찰나가 주는 저릿함을 담고 있다. 그 순간의 유일한 목격자지만, 아무런 변화를 초래할 수 없는 관객의 시선은 아키 카우리스마키적 시선을 모방하듯 그 순간에 우뚝 선다.      


지금, 이 순간 라디오에서는...     

영화가 두 사람의 사랑을 보여주는 방식은 결합이나 접촉에 있지 않다. 안사와 홀라파가 접촉하는 장면은 기억에 남지 않을 만큼 짧게 지나간다. (그럼에도 영화의 예고편에서 짧은 접촉의 순간을 강조해서 보여주는 점은 흥미롭다.) 안사가 홀라파의 뺨에 가볍게 키스하거나, 두 사람이 손을 굳게 잡는 장면에서도 거리감은 무너지지 않고 내내 지탱된다. 두 사람의 화해와 결합을 보여주는 마지막 장면에서도 회복과 재회의 기쁨을 표현하는 접촉은 없다. 그저 그들은 나란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들 사이에서 함께 걷는 반려견 ‘채플린’은 이 거리감을 강조하는 대상 같다.    

  

사람들의 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은 인물이 동물 혹은 사물과 맺는 관계와 궁극적으로 다르지 않다. 안사가 집에 홀로 있는 장면이 어딘가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이유는 일상적인 동작이 사물과 소통하는 행위로 둔갑하는 양상이 목격되기 때문이다. 집은 소통할 수 있는 전자기기로 가득한 ‘일렉트릭 하우스’다. 집안에 들어선 안사는 전자레인지로 간편식을 조리하고, 램프를 켜고, 라디오를 켠다. 일련의 행위는 언어로 서술했을 때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는 사소한 행동에 그칠 것이나, 그의 영화에서는 연극 세트 속 인물의 행위를 들여다볼 때처럼 낯설기 그지없다. 이때 사물들은 주인공과 함께 연기하는 엑스트라처럼 보인다.      

이러한 맥락에서 라디오에서 들려오는 우크라이나의 전쟁 소식도 다른 관점에서 말할 수 있다. 라디오에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서 일으킨 전쟁과 관련된 이야기가 반복해서 들려온다. 실제 역사적인 사건의 삽입은 시대성을 기입하기 위한 장치인데, 이러한 반영이 늘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최악의 경우 사건에 대해 아무것도 발언하지 않으면서 올바름을 가장하는 행위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이 장면에서의 핵심은 그것이 소리로 들려온다는 데 있다.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전쟁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는 시대에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라디오를 통해 듣기를 고집한다. 전쟁을 보여주는 대신, 전쟁에 관해 말하는 그의 방식이다.      


시각 중심 매체에 비해 라디오는 거리감을 인식하는 매체다. 시각적 충격에 의한 실감은 한계에 직면했다.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런데도 결국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무력감을 동반한다. 이러한 무력함을 해소하는 오늘의 방식은 목격자가 아닌 게이머가 되는 것이다. 시각 매체가 주는 현실성은 궁극적으로는 현장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진 채로 가까이 있고자 하는 어긋난 욕망을 나았다. 게이머는 가장 가까이 있으면서도 가장 안전하다. 보여주는 대신 들려주면서 거리감을 회복하는 과정이 필요한 이유다. 그것은 반대로 잘 보기 위해서다.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는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일정한 거리가 필요하다.      


듣는 행위는 중단하는 행위와 맞물린다. 끄는 행위는 외면이나 거부라기보다는 거리감을 드러내고 인정하는 행위다. 반대로 사운드는 거리감을 드러낼 뿐 아니라, 그렇게 서로 떨어진 것을 접합한다. 영화에서 음악은 시퀀스의 분리와 이동에 따라 중단되는 것이 아니라 시퀀스 사이를 간섭하며 넘나든다. 시선과 사운드를 통한 거리감을 인식할 때만 가능한 연결의 축복이다. 시선은 때때로 권력을 의미한다면, 듣는다는 것은 아직은 평등한 것일 수 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속에서 인물들은 거의 모든 가진 것을 빼앗기거나 잃어버리는 상태에 처했을 때도 그들 곁에는 라디오가 있었다. 영화의 마지막 들려오는 'Autumn Leaves'에 감동하게 되는 것도 그것이 우리에게 연결의 축복을 허락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떨어지는 낙엽’처럼 어딘가로부터 거리를 둔 뒤에라야 비로소 연결될 수 있는 가련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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