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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라리 Mar 17. 2020

기억 : 무성의하다는 것

상사로부터 뜻밖의 휴가를 허락받은 날. 엄밀히 말하면 집에서 일을 처리할 수 있도록 배려받은 날.


그 어느 때보다도 빠른 능률로 회사에 있었다면 하루 내도록 끝내지 못했을 일들을 저녁이 채 되기 전에 끝냈다. 그리고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별 것 들어있지 않은 냉장고에서 치즈 하나를 꺼내 입에 물었다. 딴짓을 해도 눈치를 봐야 할 상사가 없고, 내 컴퓨터 화면을 몰래 엿볼 직장 동료들이 없으니 컴퓨터를 잡고 있는 손은 기어코 깊숙이 숨겨둔 폴더 하나를 열어보기 시작했다.


별달리 비밀이어야 하는 것들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굳이 바탕화면에 공공연하게 띄워둘 것들도 아닌 것들의 집합소. 꽤 부지런하게 날짜별로 정리해둔 여행 사진들, 새벽 감성 충만하게 쓴 글들 그리고 그 속에 있는 지난날의 나의 모습들.


기억이란 게 참 무성의하다.


어쩌면 이렇게 제 마음대로 일 수 있는지. 치졸하게 싸운 친구와도 당시에는 잘 화해해 세상 행복한 웃음으로 사진을 찍었다가도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나에게 그럴 수 있었나 분노하게 만든다. 머나먼 타국에서 밤새 길거리에서 떨었던 그 순간에는 혈혈단신 타국으로 떠나오기로 결정한 제 자신을 한없이 원망했다가 지금은 또다시 그곳으로 가 낯선 바람에 온 몸을 내던지고 싶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순간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것도 모자라 그때의 감정들을 제 마음대로 변형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자리 잡게 만들다니. 무성의하고 거칠 것이 없다.


나의 편의에 의해 각색된 기억을 믿기보다 지금 내가 직시하고 있는 사실들을 믿는 것이 거대한 우주 이론을 풀어내지는 못할 지라도 나의 배고픔 정도는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다. 컴퓨터를 껐다. 컴퓨터 깊숙이 자리한 폴더는 당분간 또 동면에 접어들겠지.  


뜨끈한 설렁탕이나 한 그릇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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